<깃발없는 기수(1979,임권택)>
하명중의 연기도 좋고, 정말 젊었던 시절의 고두심, 김영애를 처음보는 기분이나 송재호, 주현의 색다른 연기도 좋았지만, 역시 7-80년대 임권택의 영화들을 신경써서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영화이다. 87년생이라서 90년 이후의 임권택 영화들만을 보고 자랐고, 어릴 때라 "우리 것"을 고수하는 영감님 생각이 고루하게 느껴지고, 또 <아제아제바라아제>에서의 강수연을 마케팅하는 방식도 맘에 들지 않아서 피해왔었는데, 예전 그의 영화들은 확실히 본받을 점이 많다. 우익으로 분류되는 선우휘의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되었고(하지만 이 작자 자체도 "불꽃"이나 "테러리스트"를 보건대 그렇게 쉽게 우익으로 치부하고 무시할 사람은 아니라는게 개인적인 생각), 당시의 사정상 반공을 기치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쓸데없는 자막이 들어가긴 했지만, 영화의 태도는 놀랍게도 냉정하다. 주제는 언제나 내가 꽂히기 마련인 "해방공간"에서 또 꽂히기 마련인 중간에 서기 어려움, 이데올로기의 광풍 아래서 개인들이 짓밟히는 참상에 관한 테마를 다루는데, 말로 이렇게 정리하기가 무안할 정도로 잔인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고수한다.
가끔은 오히려 반공을 기치로 만든 예전 한국영화의 냉정한 시선들에 놀랄 때가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오히려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견지한 사람들이 만든 영화들이 사태에 대한 고발 이상의 성격을 하지 못하고, 특히 뉴스에서 한 번 했던 저널로서의 일을 매체가 바뀌었음에도 재생산 하는 것에 그치는데 반해, 우익을 기치로 하여 만든 과거의 한국 영화들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떼어온다음, 좌익과 우익의 잔인한 짓거리들을 정말 깊이있게 다루고, 그들이 이렇게 미쳐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관객이 인물들의 악행을 인간으로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도로 하는 영화로서의 미덕을 지녔다는 것이다. 또한 소위 잘 만들어진 반공영화들은, 당연히 주인공들이 온건 우익(세상은 온건 우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의 입장을 표방하는데, 신기하게도 영화들이 이들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결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이점이 항상 놀랍고 놀라우며 또 놀랍고 놀라운 까닭에 항상 배우고 싶지만, 이렇게 해버리면 관객들이 나의 주인공에 몰입하지 못할 까 염려되어 차마 흉내내려고 엄두조차 못낸다. <깃발없는 기수>의 주인공(하명중 역)은 이른 바 해방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작가들과 시선의 궤를 함께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극단으로 치우쳤을때 어떤 일이 생길지를 잘 보여준다. 해방이후에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나, 외세가 가지고 온 이념간의 갈등이 인민 개개인이나 나아가 민족을 어떻게 결단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양공주"문제에 대해서는 여성 캐릭터들의 고통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그녀들을 "따먹지 못함"에 더 분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진 이러한 결점이 결국,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끈다. <깃발없는 기수>가 한국판 <택시 드라이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택시 드라이버>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대로 된 관객이라면 이 미치광이 주인공에 완전히 동조/몰입하지는 않을테다. 냉정한 시선이 결국 영화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물론 폴 슈레이더처럼 미친놈의 미친짓을 정말 선한 짓이라고 믿어버릴 경우라도 관객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테니 상관없다).
"냉정한 시선"에 관해서는 예전 "씨네21"에서 정성일/허문영과 임권택 감독 사이에 있었던 씨네산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생각날 수밖에 없다. 질문자들이 "감독님 영화의 냉정한 시선은, 혹시 유신체제때 겪었던 것의 반영이냐?"는 조로 질문을 했는데(다시 찾기 귀찮아서 안찾는데 저런 질문인건 맞다), 임 감독은 자신한테 그런걸 물으면 안된다면서, 자신은 일제시대에 일경들이 초등학생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떼로 총살을 하는 장면들을 익숙하게 보아왔노라고 말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뭔지 그의 7-80년대의 영화들에는 굉장히 잔인한 요소들을 냉정하게 그려내는 지점이 있다. <깃발없는 기수> 역시 집단 린치의 장면이나, 신탁-반탁의 데모대 행렬 사이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참상들, 이런 환경에서 갈 곳을 잃어버린 <오발탄>의 주인공같은 사람들, 그 사이에서 미쳐가는 주인공...
잔인하지만 냉정하게 볼 태도가 금과옥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끄적끄적여 봤다.
덧. 어문계열 수업을 들으면 항상 문자 text의 지위가 우월하다고 교수님들이 말씀하시는 탓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나오곤 하는데, 이 영화를 보며 전깃불이 깜빡깜빡하는 장면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영화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지만, 이는 당시 한반도 전력의 대부분을 공급하던 북한이 남한에 대한 전력공급을 끊음으로서 나타난 현상이고, 이런 와중에도 태연작약하게 술을 퍼마마시는 인물들의 태도를 보면 "아 이런 일이 일상이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걸 또 말로 옮기자니 별로 감동적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런 표현들은 영상 언어가 소설을 앞선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대체 대사 타이밍의 어느 중간을 전깃불이 어떻게 끊어버렸는지를, 이런 분위기를 살리면서 소설이 전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