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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26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글:Quintin)
번역2014. 5. 26. 16:40

원문: [Cinema Scope] Issue 54, 2013 spring. http://cinema-scope.com/currency/django-unchained-quentin-tarantin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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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서 풀려난 장고>

:Quintin / 번역:김탁구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2012)의 첫 장면. 흑인 병사가 링컨 대통령 앞에 당당하고 도전적으로 서 있다. 그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대들지는 않는 채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런 맥락에서 이 어휘를 쓴다는게 우습긴 하다. 그렇지 않은가?)이 북부군의 백인들과 똑같은 보수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더하여 장교가 될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급진파 흑인이지만,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영화이기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궁극적으로는 백인들의 영역이 될 것이다(토미 리 존스가 맡았던 노예폐지론의 선동가 새디어스 스티븐스). 그러나 그 병사가 씬에서(그리고 영화에서) 떠날 때 스필버그는 그가 링컨의 연설을 암기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즉 그의 온건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 스스로 흑인의 해방을 주장하느니 기다릴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는 초급진주의자인 흑인을 영화의 중심에 두고 있다. 남북전쟁 발발 2년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고, 이는 <링컨>의 시작지점과 거의 일치하는데도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장고는 복수자이고 이러한 점이 이 새 영화를 타란티노가 연출한 지난 네 작품의 핵심을 형성했던 복수의 모티프와 잘 어울리게 한다-<킬빌>연작(2003-2004), <데스 프루프>(2007), <이름도 없는 개새끼들>(2009)-. 설사 <장고>가 지난 두 작품보다 훨씬 덜 탁월하고 재미있지는 않더라고 말이다. 타란티노의 복수자들은 모두들 개인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일정부분 역사적으로 억압된 계층-여성, 유대인, 흑인-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복수의 여정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한 시절 노예였던 총잡이 제이미 폭스는 그의 부인(케리 워싱턴)을 사고 팔았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갚으려고 나선 것만은 아니다. 그가 "천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한 깜둥이"라는 사실은 그가 그 자신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백인의 지배를 그 근본에서 끝장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타란티노는 정치적 급진주의자인가? 그가 인터뷰들에서 존 포드에 관해 했던 모욕적인 언사-그는 과대 평가된 영화감독이고, 차버려야 할 인종주의자라고 말했던-는 그가 강력한 정치적 입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나는 타란티노가 이러한 주장을 심각하게 여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가 진지하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큰 광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가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그의 독창성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때문에 우리는 그를 떨쳐낼 수가 없다. 사실, 광대, 특히 재능있는 광대는 진지하고 정확하게 여겨져야 한다.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진지하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는 표면적으로는 다소 명쾌하게 보인다. 독일 출신의 별난 현상금 사냥꾼인 킹 슐츠(크리스터퍼 월츠, 진지하고도 웃길 수 있는 위대한 배우이며 타란티노의 가장 만족스러운 발견)는 장고를 구매하고는 현상범 3인조를 추적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에게 자유를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전문 살인업자 치고는 이상하게도 감상적이고 진보적인 슐츠는 장고에게 털어놓는다. 비록 그들의 여정 최후에 장고를 자유롭게 할 작정이지만 그럼에도 "야바위(skin game)"의 혐오스러운 경제학에 참여한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그래서 슐츠는 장고를 그의 동업자로 채용할 것을 제안하고, 한 시절 노예였던 그에게 읽고, 총 쏘고 말 타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 짝패는 남부를 휩쓸며  (백인) 현상범들을 죽이고 다니다가 마침내 최종 악당이자 장고의 부인의 현소유주인 캘빈 캔디(레너드 디카프리오)가 지배하는 우아한 대농장 캔디랜드에 도착하게 된다.

         장고와 슐츠가 그들을 방해하는 쓰레기 인종주의자들-특히 역겨운 빅 대디(돈 존슨)가 이끄는 최초의 KKK- 을 죽이면서 대단히 기뻐할 때도, 그들은 악명높은 노예 폐지주의자로서 노예제도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동료들과 함께 남부의 노예소유자들에게 살인 공습을  감행했던 존 브라운과 같은 인물들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찍힌 정의로운 복수라고 하는 낙인은 다소 복잡하다. 그들이 그들의 희생자들에게서 혐오하는 것은 태생적인 천박함이다. 표가 나게 세련됨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비록 장고와 슐츠가 귀족주의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그들의 여정 중에 만나는 사람들보다 우월한 엘리트에 속한다고 여긴다. 타란티노의 인물들은 어떤 바로크적인 연설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이 대중과 그들을 구별짓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그들의 태생이 천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말하는 방식 때문에 그들은 어떤 특별한 고귀함을 얻게된다. 장고와 슐츠(따라서 타란티노)가 진정으로 경멸하는 것은 백인 쓰레기다. 그들이 남부에서 마주치는 무지하고 저능한데다가 탐욕적인 족속들.

         비록 완벽한 옷과 유럽식으로 치장한 친-프랑스인 캔디가 처음에는 섬세함과 지성(무자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을 갖춘 덕에 타란티노의 영웅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인과응보 같아 보이지만, 그러한 환상은 이내 무너져내린다. 그의 권좌를 뒷받침해주는 진정한 힘이 늙고 교활한 흑인 집사 스티븐(사뮤엘 L. 잭슨)이라는 점이 까발려질 뿐만 아니라, 화려한 프랑스 어휘를 구사하고 프랑스인 신사로 일컬어지려는 그의 욕망은 그가 실제로는 프랑스말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과 배치된다. 타란티노에게는 이런 식의 현학적인 허세는 순수한  악이고,  남부의 태생적인 사악함의 한 부분이다-그리고 영화의 종반부에 캔디의 대저택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타라와 같이 불타버릴 때 남부는 상징적으로 산산이 폭발한다. 차이점은 이 대농장의 백인 거주지에 속한 어느 누구도 살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타란티노의 관점은 양키의 관점이고, 더 정확히는 딕시(미국 동남부의 여러 주-옮긴이)를 싫어하는 양키의 관점이다. 노예제도를 넘어서서 타란티노는 남부 문화 전체가 절멸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고, 타란티노는 그 문화를 구제불능상태로 썩었으며 완벽히 타락한 것으로 보여주었다.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2012, 쿠엔틴 타란티노)


         그러나 타란티노의 복수는 미국 영화사의 영토 내에서 발현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미국의 영화사는 <국가의 탄생>(1915)으로 시작되며 타란티노는 그곳에서 KKK단의 질주를 불러내어 쓸어버리고는 그들을 엄청난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우리의 광대는 이 장면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낸다. 인종주의자들의 정치학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지하는 무리들의 멍청함과 무지함까지도 경멸하고 있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또한 미국 영화의 외부로 나아가 그의 일반적인 템플릿을 발견한다. 물론 스파케티 웨스턴이며 이 영화들의 특성은 미국 고전 웨스턴에 대한 오마쥬이자 패러디로 작동한다. 타란티노는 그러한 이탈리아 영화들에 만연했던 음악, 배우, 등장인물의 이름, 플롯 포인트, 그 이상하고 휘청하는 줌들을 이용한다. 그리고는 그들의 착취적인 표본을 추적하고 거슬러 내려와 리쳐드 플레이셔의 <만딩고>(1975)에 나왔던 흑인 검투사들의 전투를 재탕해냄으로써 그들에게 처음으로 영감을 주었던 미국 영화로 되돌아간다(여러 인터뷰에서 타란티노는 <만딩고>에 대해 열광했었다).

 

<만딩고>(리처드 플레이셔,1975)


         타란티노가 영화사에 끼친 커다란 공헌은 그의 포식자적인 식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많은 이들은 오래된 영화들을 원본으로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복사하거나 인용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용한다. 그러나 대개 명망있는 작품들이 그 대상이다. 타란티노는 여러 영화들을 좋아한다. 혹은 장르 전체를 좋아한다. 그리고 대개 그것들은 흑인착취물, 스파게티 웨스턴 그리고 무협영화처럼 영화사에서 잊혀졌거나 무시당했던 것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란티노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기를 발휘한다.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같은 높이에 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에서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과 같은 중대한 작품이나 어마무시하게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작품, 그리고 모든 장르 중에 가장 미국적이라 할 웨스턴이라는 장르 자체를 공격한다. 이러한 종류의 전략은 대중적인 묘책으로 대개 여겨지지만, 여기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장고처럼, 타란티노는 자신의 길을 막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의 결과로 학구적인 평가 어느 것에서든 그의 작품들을 멀어지게 하는 탁월한 광기가 생겨난다(그것들 중 대부분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겠지만).

         이 특이한 영화광적인 태도 덕분에 타란티노의 작품에 거절 할 수 없는 신선함이 생기는 것임에도, 그 중심에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영화사에서 잊혀졌던 것에 들러붙고 전범이라 여겨졌던 것을 부인함으로써, 타란티노는 노골적으로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 동시에 기존에 행해졌던 것들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영화사를 장난감 가게처럼 취급하고서 프랑코 네로는 어느정도 중요하고 존 포드는 철저하게 무시할만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 그것의 전제적인 성질과 자유로워 보이는 성질 때문에 일정 정도 매력을 지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위계질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타란티노 자신의 사유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그의 작품은 나머지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에 신경쓰는 자들은 누구인가?

Posted by 김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