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9. 12. 9. 19:14

마틴 스코세지 :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설명 좀 드릴게요.

-마틴 스코세지, 2019년 11월 4일

*뉴욕 타임즈 기고문 번역

 



  10월 초에 영국에서, 엠파이어 매거진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마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답을 했죠. 마블 영화 몇 작품을 봤는데 저한텐 별로였다고. 마블 영화는 인생을 통틀어 제가 영화라고 생각해왔고 사랑해온 것보다는 테마파크에 가까운 거 같다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혹자들은 내 말의 마지막 부분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제가 마블 영화를 혐오하는 증거로 볼 수 있다면서요. 그런 식으로 제 말을 규정하고 싶다면, 제가 어찌할 도리는 없습니다.

  많은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재능도 뛰어나고 기예도 우수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스크린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럼에도, 제가 그런 영화들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은 제 개인적인 취향과 기질의 문제입니다. 제가 어렸다면, 프랜차이즈 영화를 재밌게 보고 저 스스로도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요. 그러나 저는 이미 성장해버렸고, 영화란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고 하는 영화에 대한 관념이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블 영화와는 한참 다릅니다.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 별 만큼이나.

  저나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다른 영화제작자들, 그리고 저와 동시대에 영화를 시작한 친구들에게 시네마는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미학적이거나 감정적인 혹은 영적인 발견이었죠. 핵심은 캐릭터입니다. 사람이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이며 사람의 본성은 얼마나 모순적이고 심지어 역설적이기도 한가. 사람들이 서로 상처 주고, 사랑하다 갑자기 마주하는 방식은 얼마나 복잡한가. 이런 것에 관한 발견이었습니다. 

  시네마란 스크린에서 그런 예기치 못한 것들을 대면하고, 시네마가 이야기로 만들고 해석해낸 것들은 현실에서 대면하며 예술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그 감각을 확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시네마는 예술이다. 이게 중요합니다. 당시에는 시네마가 예술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이 있었고, 우리는 문학이나 음악 그리고 무용처럼 시네마도 예술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이란 여러 다양한 장소에서 꼭 그만큼이나 다양한 형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퓰러의 <철모>,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의 <언제나 맑음>,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 그리고 돈 시겔의 <킬러>은 모두 예술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어떻습니까. 히치콕은 자신만의 프랜차이즈를 만들었습니다. 혹은 히치콕이 우리 시대의 프랜차이즈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히치콕의 매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옛날 극장에서 빽빽한 사람들과 함께 <이창>을 본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은 전율이 이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히치콕 영화들에는 테마 파크 같은 면이 있습니다. <열차 위의 이방인>의 클라이막스는 진짜 놀이 공원의 회전 목마에서 일어납니다. 개봉일 자정에 보았던 <싸이코>의 경우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사람들은 놀라고 싶고 스릴감을 느끼기 위해 갔으며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60~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그 영화들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그 스릴과 충격 때문에 우리가 계속 다시 보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편집은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고통스런 감정이나 캐리 그란트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상실감(lostness)이 없다면, 그 편집은 그저 역동적이고 고상한 구도와 컷을 나열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열차 위의 이방인>의 클라이막스도 엄청납니다. 하지만 두 주연 캐릭터들의 상호작용과 로버트 워커가 보여준 심오하리만치 불안한 연기가 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치는 것입니다. 

  혹자는 히치콕의 영화는 다 똑같다고 말합니다.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히치콕 자신도 그 점을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프랜차이즈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똑같음’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네마를 규정하는 많은 요소들이 마블 영화에도 있습니다. 마블 영화에 없는 것은 새로운 발견입니다. 어떤 (인간사의) 미스터리도 없고 (보는 이가) 감정적인 위험에 놓이지도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마블 영화는 특정한 요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제한된 테마를 변주하는 식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제목으로 보면 시퀄이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리메이크에 불과합니다. 마블 영화의 모든 것은 공식적으로 누군가의 승인을 받습니다. 왜냐면, 다른 방식으론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 프랜차이즈 영화의 특성입니다. 소비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시장 조사를 하고, 관객 테스트를 거치고, 심사받고, 수정되고, 다시 심사받고 다시 수정되는 것이죠.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나 클래어 드니나 스파이크 리, 그리고 아리 에스터와 캐서린 비글로우, 웨스 앤더슨은 절대 하지 않는 모든 것을 마블 프랜차이즈는 한다는 이야깁니다. 열거한 감독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제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볼 것이며 이 영화들이 저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심지어 아직 뭐라 이름붙일 수도 없는 경험의 영역으로 말이죠.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한 저의 관념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뭐야? 이렇게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그냥 수퍼히어로 영화나 프랜차이즈 영화들 좀 내버려두지? 하고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국과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대형 스크린에 걸린 무언가를 사람들이 보려 할 때, 프랜차이즈 영화가 우선 순위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건다는 면에서는 아주 위험한 시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독립 영화관의 숫자는 적습니다. 판이 완전히 바뀌어 스트리밍이 이제 배급의 1순위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중 대형 스크린에 걸 생각으로 영화를 디자인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들 극장의 많은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저도 당연히 그런 부류중 한 명입니다. 넷플릭스 용으로 영화를 끝마친 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겁니다만, 넷플릭스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아이리시맨>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점을 항상 고마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틀 기회를 가졌고, 그 자체로도 아주 좋습니다. 저는 더 긴 기간 동안 대형 스크린 위에서 <아이리시맨>을 상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와 영화를 만들든, 멀티플렉스의 상영관은 프랜차이즈 영화들로 꽉 찰 것입니다. 

  혹자가 저에게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일 뿐이라 말한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주고서는 끝도 없이 그 한 가지 것만 판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 한 가지 것을 더 원하겠죠.
 
  그냥 다들 집에가서 넷플릭스나 아이튠즈, 훌루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다른 것을 보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대형스크린에서만 빼고요. 문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대형 스크린에서 보여지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지난 20년간, 영화 산업은 모든 측면에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변화는 은밀하고 보이지 않게 이루어졌습니다. 조금씩 하지만 지속적으로 영화에서 ‘리스크’가 제거되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영화들은 즉각적으로 소비되기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상품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재능있는 팀과 개인들이 만들어낸 웰 메이드 작품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영화들은 시네마에 있어서 본질적인 무언가가 없습니다. 예술가 개인이 만든 하나의 관점(vision)이 없습니다. 이는 당연히, 예술가 개인이 가장 위험한 요인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영화라는 예술에 보조금을 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건재했을 때, 예술가와 경영하는 사람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있었습니다 지속적이고 강렬했지만 또 생산적인 긴장이기도 했습니다. 그 덕에 영화 역사 상 걸작들이 만들어지고 했고요. 밥 딜런 말을 빌리자면, 그러한 긴장관계들 중 최선의 것은 “영웅적이며 통찰력”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런 긴장은 사라져버렸고, 업계에는 예술의 근본적인 질문과 시네마의 역사에 완벽히 무관심한 것들만 남았습니다. 오만하고 독점적인 것들만(최악의 조합입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완벽하게 나뉜 두 개의 영영입니다. 하나는 전세계적인 시청각적 산업이고, 다른 하나는 시네마입니다. 때때로 두 영역을 오가는 작품들도 있지만, 그것은 갈수록 드문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영역 중 산업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점점 더 시네마의 존재를 주변화하고 심지어 폄훼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 꿈을 꾸거나 이제 막 만들기 시작한 분들이여, 현재 상황은 예술에게 야만적이고 적대적입니다. 단순히 그렇다고 끄적이는 것만으로도 무지하게 슬퍼지네요. 



   

        
 

 


 




 

Posted by 김탁구
번역2014. 6. 13. 01:54

*제목은 본인이 임의로 단 것입니다.

*원문: John Landis, <<Monsters in the Movies>> 중. 

*본문에 앞서 : "JL"은 인터뷰어 John Landis를, "DC"는 인터뷰이 David Cronenberg 를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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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의 대화(옮긴이:김탁구)


<폭력의 역사>(2005) 세트장에서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JL: 데이비드, 괴물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DC: 괴물이라는 것은 정상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은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비틀리게 되는 것이지요. 괴물과 같은 형상은 위협적이고 역겨운데,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여기는 울타리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괴물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 따라서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에 기형이 일어난 것이죠.


JL: 최초로 괴물 영화를 보았을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DC: <밤비>(제임스 앨거/새뮤얼 암스트롱, 1942))가 무서웠죠. <밤비>를 보면 인간이야말로 괴물이에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나 자신을 밤비와 동일시했지요. 당신의 엄마를 죽인 사냥꾼은 명백히 괴물일 수밖에 없는겁니다!


JL: 프랑켄슈타인, 드라큐라, 늑대인간과 같은 고전적인 괴물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들려주실까요?


DC: 모두 정상적인 인간성에 기형이 일어난 존재들이지요. 그것들은 괴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축에 속할 겁니다. 그렇지만 <죠스>(스티븐 스필버그, 1975)에 나오는 상어는 괴물이 아니에요. 당신을 죽이도록 고안된 동물일 뿐이죠. 얘한테는 감정이 없어요. 눈을 보면 죽은 눈이죠. 살인 기계라는 겁니다. 이것이 괴물의 조건에 부합할까요? 사실 그렇지 않지요. T-Rex도 마찬가지입니다.


JC: 고질라나 사이클롭스 혹은 드래곤은 어떤가요?


DC: 그 안에서도 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이클롭스는 인간의 형태에 기형이 온 것이지요. 어디보자, <해리 포터>에도 티라노사우르스 렉스에 기반한 대단한 괴 생명체들이 있어요. 제 생각에는 괴물의 형상이 인간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점점 더 자연 재해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가 상어한테 먹힌다면, 이건 거의 번개에 맞은 거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여기엔 어떤 사악한 의도가 없거든요. 정상인 것처럼 행동하는 동물같은 기계일 뿐입니다. 자연적인 사건일 뿐이지요. 


JL: <죠스>를 보면, 상어한테 인격을 부여합니다. 상어를 사악하게 만든단 말이에요.


DC: 맞는 말이에요... 상어를 신비화할 목적인 것이지요. 상어를 살인 기계 이상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죠스>가 사람을 잡아먹는 피라냐 수백마리가 나오는 영화보다 더욱 성공적이었을 겁니다. 상어가 한 마리라는 사실이 핵심이에요. 모비 딕과 같은 것이지요. 동물을 인간화하고 신비화한다는 면에서요. 사이클롭스의 경우에서처럼, 괴물을 인간으로 인지할 수가 있다면, 괴물, 괴물같은 그리고 괴물성이라는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가 특별해지면서도 울림이 있습니다. 


JL: 네. 프량켄슈타인이나 늑대인간 같은 괴물에 저는 항상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들은 피해자이니까요.


DC: 예. 이러한 캐릭터들에는 캐릭터들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층이 있습니다.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끝없이 뱀파이어 영화들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뱀파이어들이 더욱 더 인간적이게 될 수록, 그리고 <트와일라잇>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심지어 아름답게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장애인과 같은 어떤 무엇으로 여기게 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인간이고 어떤 질병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감정이입까지 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됩니다. 괴물이 정말로 위험한 괴물이라고 느껴지려면 어떤 위험하다는 느낌이 있어야만 합니다.    


JL: 최근들어 나타난 좀비에 대한 열광은 어떤가요? 살을 먹고, 죽은 채 걸어다니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요.


DC: 솔직히 비디오 게임과 관계된 것 같아요. 자꾸 말하지만 정상적인 인간들이 기형된 것입니다. 외관상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 열광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JL: 비디오 게임과 관련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신다면요?


DC: 비디오 게임의 초창기 시절에, 아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긴다는 부모들의 공포심을 떨쳐내기 위해서 실제로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죽이게 해야했습니다.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생명체라면, 죽여도 되게되는 겁니다. 좀비를 다루는 영화나 티비 시리즈를 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의 실질적인 부분들은 좀비를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죽이는 데서 오는 것이지요. 좀비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동정심을 자극하지 않아요. 모든 초점이 이를테면 "살육하는 재미"와 같은 것들에 맞추어집니다. 뱀파이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지요.


JL: 악마나 악령 혹은 사탄한테 빙의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DC: 악마니 악령이니 따위의 것과 관련해서는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들을 믿지를 않으니깐요. 그래서 제 작품 어느 것에서도 그런 주제를 다루지 않았지요.


JL: 영화는 불신의 유예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저는 무신론자 이지만 유대인이에요. 그리스도나 악마를 믿지는 않지만,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디킨, 1973)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무서워서 지리는 줄 알았어요.


DC: <엑소시스트>는 무서웠지요. 매우 효과적이었어요.


JL: 왜냐하면..


DC: 왜냐하면 관객들에게 진짜처럼 보이는 세계를 창조해냈고,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들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인물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관객들은 영화 속에 존재하고 싶어해요. 영화감독으로서 그러한 욕망을 이용할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셈이지요. 관객들이 그러한 점을 원해서 영화를 보러 왔는데, 당신이 영화에서 그들을 쫓아낸다면, 그렇다면 당신이 잘못한 것이지요. 만약 그들을 영화 속으로 끄집어올 수 있다면, 그렇다면, 맞아요, 전적으로 설득력있는 분위기(ambience)를 창조할 수 있다는 얘기이지요. 영화가 지속되는 시간동안 관객들은 그 세계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해요. <엑소시스트>는 완벽하게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고, 아주 서서히 당신을 끌어드립니다. 그러다가 당신의 머리를 쾅 하고 쳐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불신의 유예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표본이지요.


JL: 어쩌다가 <파리>(1986)에 끌리게 되셨나요? 이 작품은 미친 과학자를 정말 잘 보여주었습니다.


DC: 토론토 대학에서 유기 화학을 공부했어요.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과학자 겸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파리>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당대 최첨단이었던 자연 과학에 기반했다는 사실이 저에게 매력있어 보였어요. 마법이 아니지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딱 물리적이에요. 정확히 신체에 기반한 것이지요. 무신론자로서, 실존주의적 유대인으로서, 저는 신체야 말로 우리 자신이고, 종교는 그것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라고 생가합니다. 그러한 공포로부터...


JL: 당신 작품들 중 상당수가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 다루고있습니다...


DC: 맞아요.


JL: <파리>에서 제프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암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감독님 작품 상당수에서 암이나 노화를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아요...


DC: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점이 흥미롭지 않나요? 제 말은, 우리가 점점 늙어가면서 말이지요, 아마 당신에게 가까울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괴물같아 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된단 말이에요. 그들이 나이가 듦에 따라 그들의 신체가 변형된다는 의미에서 괴물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도 아마 불쾌한 쪽으로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이게 바로 괴물다움의 핵심이에요. 영화가 환상적이게 될 수록, 악마이니 하는 것들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지요, 영화들이 당신의 신체 그러니까 인간적인 실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JL: <엑소시스트>를 죠지 폴시 쥬니어와 짐 오루크라는 한 시절 복사를 한 적 있으나 지금은 신앙을 잃은 사람들과 보았어요. 저 역시 그 영화가 무서웠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는 잘 잤어요. 그런데 짐과 죠지는 몇 주동안이나 악몽을 꾸었지요!


DC: 그러나 <파리>에서는, 비록 우리가 과학자가 아니고 텔레포드를 타보지 않더라도, 인간이기에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을 보거나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되거나 너무 일찍 죽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게 됩니다. 어떤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든지 <파리>에서 제프 골드블룸이 맡았던 세스 브런들이라는 인물에게 일어난 일과 관계가 있을 수 있지요...


JL: 감독님께서는 제프 골드블룸을 미친 과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 거군요?


DC: 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미치지 않았어요. 과학자와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꽤 자세히 읽는 편입니다... 그들은 좀 이상한 종자들이에요. 그렇지만 그들은 정확히 인간적이에요. 전혀 미치지 않았지요.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인 겁니다.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영화감독들도 과학자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기술을 가지고서 이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고, 세계를 찾아내고 탐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과학 실험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JL: 영화 속의 미친 과학자들이나 미친 의사들은 대개 그릇된 신념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지"하는 식으로요. 우리는 신의 업적을 망치면 안되는 겁니다. 이러한 영화들은 매우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부분이 있어요. 비록 제가 감독님을 보수적이거나 수동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감독님 작품에 나오는 모든 과학자들도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되는 것 같아요.


DC: 음,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죠지 버나드 쇼가 말했지요. "갈등이야 말로 드라마의 본질이다." 극적 충동(dramtic compulsion)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영화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신 때문이 아닌 것이지요!


JL: 그렇지만 감독님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가 알아서는 안되는 것"에 연루되는 과학자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DC: 그렇지만 그것들은 그가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죠. 그건 꽤 다른 겁니다...


JL: 그렇지만 감독님 작품들에서 "그가 알아야만 하는 것들"은 폭력이니 죽음으로 끝맺음 됩니다.


DC: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흥미롭지 않을 테니깐요. 극적 충동이라는 게 그런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야 관객들이 흥미롭고 설득력있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JL: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DC: 네. 일종의 오만한 구석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 실존과 인류의 물질적 실존의 본질을 포착하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연관되는 지를 이해하려는 것도 또한 실질적인 욕망입니다. 저의 접근법은 윌리엄 버러우의 접근법과 유사해요. "예술은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창조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로 진화해나가면서 이 행성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비를 맞고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피할 곳을 찾습니다. 춥다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불을 피웁니다.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저에게는 그런 것이 인간 활동의 기본이에요. 이것을 극으로 옮기다보면, 무섭지만 흥미로운 맥락에서, 과학자들이 파국을 맞게되는 지점에서 끝내게 될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사실상 많은 과학자들이 파국으로 인생을 끝내게 되니깐요. 우주 왕복선 폭발로 운명을 달리한 우주비행사들처럼 말이에요. 과학자들은 그들이 탐사하는 사물들을 탐사하는 행위에 놓인 잠재적인 위험성에 대해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어마무시한 강박을 느끼는 거에요. 창조적인 강박이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지요. 제 영화들은 종종 그러한 일을 하는 데 치뤄야하는 비용에 대해 면밀히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고성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파리>(1986)의 스타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JL: 그렇군요, 데이비드! 그러나 당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런 이야기들은 경고성을 띄게 됩니다. 파국으로 끝나니깐요.


DC: 세계의 모든 의학적 발견에는 희생자가 따르는 법입니다. 연구자든 과학자든지간에요...


JL: 감독님의 <파리>에서 인상적인 것은 골드블룸의 캐릭터가 정말로 매력적이이면서도 웃기면서도 지적인 점이었어요. 


DC: 그들 스스로를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만듦으로써 특정 질병으로 고생하는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당신을 잠식한 이러한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거리두는 방법은 과학자처럼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는 것이지요. 당신 스스로를 당신 연구의 환자나 표본인것처럼 따져보는 겁니다. 


JL: 어째서 우리는 공포 영화(horror films)를 좋아하는 걸까요?


DC: 죽음에 대처해보는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JL: 그건 롤러코스터와 같은 거잖아요.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타면 느끼는...


DC: 아니요, 아니요, 그 말이 아니에요. 레이싱 카나 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한테 말한다고 칩시다. "내가 이제 죽는구나" 와 같은 요소가 물론 있습니다. 잘 설계된 롤러코스터라면 그런 느낌을 주겠지요. 속도와 중력에서 오는 놀랄만한 감각에 더하여 거기에는 자유로워진다는 감각도 있습니다. 아주 유쾌한 느낌이지요. 이것은 단지 죽음에 도전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롤러코스터를 스무번쯤 타면, 그러한 공포감을 잃게 되지요.


JL: 포뮬러 원 자동차를 운전할 때 말이죠 데이비드, 실제적인 공포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차가 전복돼서 죽을 수도 있잖아요. 실제로 충돌해서 전소될 수도 있는거구요. 롤러코스터를 탈 때 속도나 중력 그리고 낙하를 통해 그 모든 느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 이론은 사람들이 호러 영화를 보러가는 데에는 안전한 상태에서 그러한 느낌을 경험하러 간다는 것이지요. 감독님은 동의하지 않으시겠지요?


DC: 호러 영화를 본다는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은 본능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사색적이지는 않지요. 좋은 호러 영화는 그러한 양자의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행위에는, 제가 아는 한 철학은 결여되어있어요. 


JL: 그래요. 제가 졌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을 공포스럽게 하는 영화들을 왜 보고 싶어하는 걸까요?


DC: 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을 담당하는 치과의사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왜 당신이 만든 공포 영화를 보러 가야하지요? 내 인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공포를 겪고있는데 말이지요."

Posted by 김탁구
번역2014. 5. 31. 16:24

*[Cinema Scope] 2013년 겨울호( Issue 53)

*원문 : http://cinema-scope.com/currency/argo-ben-affleck-us/

*첫번째 이미지를 제외한 나머지 이미지 및 동영상은 원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옮긴이가 임의로 삽입하였음을 밝힙니다.

*블로그 주인장이 취미로 번역한 것으로서 번역과 관련한 일체의 질문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


"아르고"(:Quintin / 번역:김탁구)



 

         <아르고> <이름 없는 개새끼들(Inglorious Basterds)>의 반대판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에 대한 대답 정도는 되어 보인다. <이름 없는 개새끼들>에서는 영화가 현실에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어야 한다고 가르쳤었다면, <아르고>는 영화의 도움을 입어 실제로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시한다. 비록 아야톨라의 아귀에서 인질 몇 명을 구출하는 것이 나찌 두목을 죽이고서 제2차 세계대전의 결론을 바꾸는 것만큼 매혹적이지야 않겠지만, 두 작품 모두 영화가 정의를 실천하고 더 나은 세계를 주조해내는 전지전능한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란티노의 과대망상증적인 이야기는 영화감독에게 역사를 수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반면, 벤 애플렉의 작품은 역사가 실제로 영화에 의해 어떻게 변했는지를 묵묵히 보여주는 좀 더 겸손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나 면밀히 관찰해보면, <아르고>가 그렇게  겸손한 것만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도구이고 너무나 현실적(real)이기에 모든 선택지가 불가능해졌을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일 수도 있다는 점을 증명해내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영화의 야망 중 작은 일부일 뿐이다.

 

         필자는 <아르고>, 물론 각색이야 되었지만 실제 이야기에 기반한 플롯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았다. 결정적으로 필자는 1979년 테헤란에서 발생한 미 대사관 점거 사건에서 여섯명의 미국 외교관들이  탈출한 후 3개월동안 캐나다 대사관에 숨어 지내다가 캐나다 당국의 도움을 입어 미 정보당국에 의해 이란으로부터 구출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재미야 있지만 작품의 플롯이 완전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누가 저 미국 사람들을  가짜 싸이파이(sci-fi) 영화의 스태프로 위장켜서는 구출해낼 수 있겠느냐고 계속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 <아르고> <이름 없는 개새끼들>만큼이나 말이 안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았다. 때문에 필자의 반응은 정확히 "아르고 니미 뒈져라(Argo fuck yourself)" 프로젝트에 마지못해 초록불을 허락하는 미 스파이들과 공무원들의 반응과 같을 수 밖에 없었다("아르고 니미 뒈져라" 프로젝트는 가짜 영화에 참여한 진짜 프로듀서 역할을 한 알랜 아킨과 존 굿맨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아르고(Argo,2012)> 중. "아르고가 뭔 뜻이래요?" "아르고 니미 뒈져라는 뜻이지."

 

         CIA와 국무부가 인질을 구하는 방법을 놓고 논쟁을 할 때, 선택지 <아르고>는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르고>는 성공한다. 그 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장르가 너무나도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며 사람들을 파고드는 힘이 있는 탓에 거대한 정치적 소요 상태에 있는 격분한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 정신나간 B무비를 만드는 일이 평범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란 당국이 생각할 때도 정상적인 일이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작품의 클라이막스에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공항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감독(글쓴이의 착각이다. 실제로는 '부제작자'이다-옮긴이)" 역할을 맡은 외교관이 이 영화를 이란 경찰에게 설명하고, 스토리보드를 보여주며 그들을 설득시킨다.  바로 이 때 <아르고>는 결국 존재로서 영화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30년이 지난 다음, 해낸 것이다!


 <아르고> 중 공항 심문 시퀀스


         <아르고>는 영화가 사람들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해방시키기도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항상 시네필과 일군의 비평가들, 영화감독들이 주장해오던 강력한 은유이지만, 영화 산업 특히 할리우드는 만들어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다.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가지고 있는 대략적인 아이디어에 일, 돈 그리고 재미는 포함되지만 대개 비지니스로 간주되었던 더 넓은 활동의 영역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할리우드 역사의 심장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관념이 있었다. 영화란 것이 어쨌든 보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정보를 전달하거나 교육시키거나 전쟁 활동에 협력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할리우드가 전 세계를 미국화했던 역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할리우드" 역시 플라톤적 이상의 한 종류라는 것이다. , 정치학, 사회학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지도(map)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현실은 이 지도에 맞춰가야 한다. 할리우드의 작품들은 관념의 영역에 존재하고, 이 공간에서 사물들은 그들이 마땅히 그리 해야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공간에서 개인주의는 너그러움의 반대말이 아니며, 확고함은 광신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 곳에서 애국주의는 세계주의(cosmopolitanism)의 대척점이 아니며, 용기는 총을 들고다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곳에서는 누구든지 약간의 반전을 겪는다면 종국에는 영웅이 될 수 있다. "할리우드"는 강인하면서도 젠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불공정한 명령에 항거하고 불필요한 요식을 불편해하면서도 동시에 시스템의 일원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명석하고, 창의적이고, 능력이 좋고 진지하면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곳이다. 할리우드에서는 옳음과 그름을 구별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상황과 관련된 모든 뉘앙스를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할리우드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아르고>는 위와 같은 관념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작품이다. 산 사람들은 구출되고 전문가들은 악을 물리친다 - CIA와 영화 산업의 전문가들에 의해. 양쪽의 전문가들은 모두 일의 규칙을 대단히 존중하면서도 필요하면 그 규칙을 깰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대단히 존중한다. 아마도 <아르고> 최고의 장면은 아킨과 굿맨이 맡은 캐릭터가 스튜디오 사무실로 되돌아가 매우 중대한 전화를 받기 위해 영화를 찍고 있는 세트장을 밀치고 지나갈 때 일 것이다. 이 장면은 CIA의 구출가인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가 명령에 불복하고 작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던 장면과 유사하다. 정치계 윗 선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영화 산업에서 만큼이나 딱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안하네만 급한 전화를 받아야 하니 촬영장 좀 지나감세. 내 에이전시한테 말하라고."

 

         그러나 이 영화의 도덕성은 이러한 비교점을 넘어 계속된다. <아르고>는 영화에서 제작자들이 가끔 부리는 트릭 보다 더 큰 의미에서 영화가 정치를 구원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영화와 정치가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된다면, 정치가 영화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결국 판타지와 리얼리티 사이에 차이는 없다. 할리우드에서 통하는 것은 미합중국에서도 통한다. 영화에서 말해진 것이나 행동된 것은 실제 세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니 결국, 할리우드는 꿈의 공장이 아니라, 영감의 원천이며 실제 활동의 원천인 것이다. 할리우드와 CIA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아마 할리우드에서는 공로를 모두가 알아준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대안적인 구출 방안으로서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이 있었고 이는 실제 카터 행정부에서 1980 4월에 남아있는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실시한 방안이기도 하다.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고, 그랬기 때문에 카터 대통령의 재선출 기회 역시 날아가버렸다. <아르고>는 이러한 중대 실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터 행정부의 조그마한 성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따지고 보면 그렇게 서툰 사람은 아니었고, 공화당원들 보다 훨씬 젠틀하게 이야기하지만 때론 민주당 실력자들-그들은 할리우드 영화 특히 <아르고>에서 볼 수 있는 언어와 매우 밀접한 언어를 구사한다-도 터프하고 애국적이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함으로써, 카터를 치켜세우는 셈이다. 애플렉의 영화는 어떻게 이성이 광기를 잠재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때 광기는 아야톨라 진영의 과격파와 미국 측의 매파 양쪽 모두의 광기를 의미한다. <아르고>는 이성, 유연함, 그리고 상상력-이들은 좋은 각본을 위한 핵심이다-이 나라를 통치하는 데도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민주당원들이 늘상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화가 응당 한 번 더 재임할 자격을 주고 있는 지미 카터를 떠올려보라. 비슷한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의 선조들에게 주어졌던 운명에서 벗어났던 버락 오바마와 같은 사람들은 어떤가. <아르고>가 오바마를 위한 캠페인 영화라는 사실은 꽤 명백해 보인다.

Posted by 김탁구
번역2014. 5. 26. 16:40

원문: [Cinema Scope] Issue 54, 2013 spring. http://cinema-scope.com/currency/django-unchained-quentin-tarantino-us/

블로그 주인이 임의로 번역한 것으로, 오역 문의는 받지 않고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동영상은 주인장이 임의로 삽입한 것으로 원문에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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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서 풀려난 장고>

:Quintin / 번역:김탁구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2012)의 첫 장면. 흑인 병사가 링컨 대통령 앞에 당당하고 도전적으로 서 있다. 그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대들지는 않는 채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런 맥락에서 이 어휘를 쓴다는게 우습긴 하다. 그렇지 않은가?)이 북부군의 백인들과 똑같은 보수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더하여 장교가 될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급진파 흑인이지만,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영화이기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궁극적으로는 백인들의 영역이 될 것이다(토미 리 존스가 맡았던 노예폐지론의 선동가 새디어스 스티븐스). 그러나 그 병사가 씬에서(그리고 영화에서) 떠날 때 스필버그는 그가 링컨의 연설을 암기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즉 그의 온건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 스스로 흑인의 해방을 주장하느니 기다릴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는 초급진주의자인 흑인을 영화의 중심에 두고 있다. 남북전쟁 발발 2년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고, 이는 <링컨>의 시작지점과 거의 일치하는데도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장고는 복수자이고 이러한 점이 이 새 영화를 타란티노가 연출한 지난 네 작품의 핵심을 형성했던 복수의 모티프와 잘 어울리게 한다-<킬빌>연작(2003-2004), <데스 프루프>(2007), <이름도 없는 개새끼들>(2009)-. 설사 <장고>가 지난 두 작품보다 훨씬 덜 탁월하고 재미있지는 않더라고 말이다. 타란티노의 복수자들은 모두들 개인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일정부분 역사적으로 억압된 계층-여성, 유대인, 흑인-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복수의 여정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한 시절 노예였던 총잡이 제이미 폭스는 그의 부인(케리 워싱턴)을 사고 팔았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갚으려고 나선 것만은 아니다. 그가 "천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한 깜둥이"라는 사실은 그가 그 자신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백인의 지배를 그 근본에서 끝장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타란티노는 정치적 급진주의자인가? 그가 인터뷰들에서 존 포드에 관해 했던 모욕적인 언사-그는 과대 평가된 영화감독이고, 차버려야 할 인종주의자라고 말했던-는 그가 강력한 정치적 입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나는 타란티노가 이러한 주장을 심각하게 여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가 진지하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큰 광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가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그의 독창성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때문에 우리는 그를 떨쳐낼 수가 없다. 사실, 광대, 특히 재능있는 광대는 진지하고 정확하게 여겨져야 한다.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진지하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는 표면적으로는 다소 명쾌하게 보인다. 독일 출신의 별난 현상금 사냥꾼인 킹 슐츠(크리스터퍼 월츠, 진지하고도 웃길 수 있는 위대한 배우이며 타란티노의 가장 만족스러운 발견)는 장고를 구매하고는 현상범 3인조를 추적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에게 자유를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전문 살인업자 치고는 이상하게도 감상적이고 진보적인 슐츠는 장고에게 털어놓는다. 비록 그들의 여정 최후에 장고를 자유롭게 할 작정이지만 그럼에도 "야바위(skin game)"의 혐오스러운 경제학에 참여한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그래서 슐츠는 장고를 그의 동업자로 채용할 것을 제안하고, 한 시절 노예였던 그에게 읽고, 총 쏘고 말 타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 짝패는 남부를 휩쓸며  (백인) 현상범들을 죽이고 다니다가 마침내 최종 악당이자 장고의 부인의 현소유주인 캘빈 캔디(레너드 디카프리오)가 지배하는 우아한 대농장 캔디랜드에 도착하게 된다.

         장고와 슐츠가 그들을 방해하는 쓰레기 인종주의자들-특히 역겨운 빅 대디(돈 존슨)가 이끄는 최초의 KKK- 을 죽이면서 대단히 기뻐할 때도, 그들은 악명높은 노예 폐지주의자로서 노예제도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동료들과 함께 남부의 노예소유자들에게 살인 공습을  감행했던 존 브라운과 같은 인물들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찍힌 정의로운 복수라고 하는 낙인은 다소 복잡하다. 그들이 그들의 희생자들에게서 혐오하는 것은 태생적인 천박함이다. 표가 나게 세련됨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비록 장고와 슐츠가 귀족주의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그들의 여정 중에 만나는 사람들보다 우월한 엘리트에 속한다고 여긴다. 타란티노의 인물들은 어떤 바로크적인 연설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이 대중과 그들을 구별짓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그들의 태생이 천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말하는 방식 때문에 그들은 어떤 특별한 고귀함을 얻게된다. 장고와 슐츠(따라서 타란티노)가 진정으로 경멸하는 것은 백인 쓰레기다. 그들이 남부에서 마주치는 무지하고 저능한데다가 탐욕적인 족속들.

         비록 완벽한 옷과 유럽식으로 치장한 친-프랑스인 캔디가 처음에는 섬세함과 지성(무자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을 갖춘 덕에 타란티노의 영웅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인과응보 같아 보이지만, 그러한 환상은 이내 무너져내린다. 그의 권좌를 뒷받침해주는 진정한 힘이 늙고 교활한 흑인 집사 스티븐(사뮤엘 L. 잭슨)이라는 점이 까발려질 뿐만 아니라, 화려한 프랑스 어휘를 구사하고 프랑스인 신사로 일컬어지려는 그의 욕망은 그가 실제로는 프랑스말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과 배치된다. 타란티노에게는 이런 식의 현학적인 허세는 순수한  악이고,  남부의 태생적인 사악함의 한 부분이다-그리고 영화의 종반부에 캔디의 대저택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타라와 같이 불타버릴 때 남부는 상징적으로 산산이 폭발한다. 차이점은 이 대농장의 백인 거주지에 속한 어느 누구도 살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타란티노의 관점은 양키의 관점이고, 더 정확히는 딕시(미국 동남부의 여러 주-옮긴이)를 싫어하는 양키의 관점이다. 노예제도를 넘어서서 타란티노는 남부 문화 전체가 절멸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고, 타란티노는 그 문화를 구제불능상태로 썩었으며 완벽히 타락한 것으로 보여주었다.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2012, 쿠엔틴 타란티노)


         그러나 타란티노의 복수는 미국 영화사의 영토 내에서 발현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미국의 영화사는 <국가의 탄생>(1915)으로 시작되며 타란티노는 그곳에서 KKK단의 질주를 불러내어 쓸어버리고는 그들을 엄청난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우리의 광대는 이 장면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낸다. 인종주의자들의 정치학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지하는 무리들의 멍청함과 무지함까지도 경멸하고 있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또한 미국 영화의 외부로 나아가 그의 일반적인 템플릿을 발견한다. 물론 스파케티 웨스턴이며 이 영화들의 특성은 미국 고전 웨스턴에 대한 오마쥬이자 패러디로 작동한다. 타란티노는 그러한 이탈리아 영화들에 만연했던 음악, 배우, 등장인물의 이름, 플롯 포인트, 그 이상하고 휘청하는 줌들을 이용한다. 그리고는 그들의 착취적인 표본을 추적하고 거슬러 내려와 리쳐드 플레이셔의 <만딩고>(1975)에 나왔던 흑인 검투사들의 전투를 재탕해냄으로써 그들에게 처음으로 영감을 주었던 미국 영화로 되돌아간다(여러 인터뷰에서 타란티노는 <만딩고>에 대해 열광했었다).

 

<만딩고>(리처드 플레이셔,1975)


         타란티노가 영화사에 끼친 커다란 공헌은 그의 포식자적인 식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많은 이들은 오래된 영화들을 원본으로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복사하거나 인용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용한다. 그러나 대개 명망있는 작품들이 그 대상이다. 타란티노는 여러 영화들을 좋아한다. 혹은 장르 전체를 좋아한다. 그리고 대개 그것들은 흑인착취물, 스파게티 웨스턴 그리고 무협영화처럼 영화사에서 잊혀졌거나 무시당했던 것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란티노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기를 발휘한다.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같은 높이에 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에서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과 같은 중대한 작품이나 어마무시하게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작품, 그리고 모든 장르 중에 가장 미국적이라 할 웨스턴이라는 장르 자체를 공격한다. 이러한 종류의 전략은 대중적인 묘책으로 대개 여겨지지만, 여기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장고처럼, 타란티노는 자신의 길을 막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의 결과로 학구적인 평가 어느 것에서든 그의 작품들을 멀어지게 하는 탁월한 광기가 생겨난다(그것들 중 대부분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겠지만).

         이 특이한 영화광적인 태도 덕분에 타란티노의 작품에 거절 할 수 없는 신선함이 생기는 것임에도, 그 중심에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영화사에서 잊혀졌던 것에 들러붙고 전범이라 여겨졌던 것을 부인함으로써, 타란티노는 노골적으로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 동시에 기존에 행해졌던 것들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영화사를 장난감 가게처럼 취급하고서 프랑코 네로는 어느정도 중요하고 존 포드는 철저하게 무시할만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 그것의 전제적인 성질과 자유로워 보이는 성질 때문에 일정 정도 매력을 지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위계질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타란티노 자신의 사유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그의 작품은 나머지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에 신경쓰는 자들은 누구인가?

Posted by 김탁구
번역2014. 2. 7. 23:35


*본문 이전에*

마돈나의 "마일즈 어웨이"란 노래의 가사를 번역해보았습니다.

운율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노래 분위기를 생각하며 의역하였습니다.

위대한 작곡가 되실 분께서 이 노래를 들려줬는데, 너무 좋아서 그만...

지금의 제 상황과 밀접한 부분이 있어서 더욱 애착이 가는 것 같군요.



"Miles Away" Official M/V


*본문 시작*


"Miles Away" "저 멀리 떨어져 있지만"

I just woke up from a fuzzy dream
You never would believe the things that I have seen
I looked in the mirror and I saw your face
You looked right through me, you were miles away

어렴풋한 꿈을 꾸다 막 깨어났어요
내가 본 걸 당신은 절대로 믿을 수 없겠죠
거울을 보았는데 당신 얼굴이 보였거든요
나를 통해서 바로 당신이 보인거에요, 당신은 저 멀리 떨어져있는데

All my dreams, they fade away
I'll never be the same
If you could see me the way you see yourself
I can't pretend to be someone else

모든 꿈들이, 사라져가요
나는 이전 같을 수는 없을 거에요
당신 자신을 보는 방식 그대로 나를 보아준다면
나를 다른 사람으로 가장할 순 없겠죠
(*거울에 비친 나의 이미지를 자아로 생각해보면 "가장할 순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Always love me more, miles away
I hear it in your voice, miles away
You're not afraid to tell me, miles away
I guess we're at our best, miles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멀리 떨어져있지만, 항상 나를 더욱 사랑해줘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내가 당신 목소리에서 사랑을 들을 수 있게
멀리 떨어져있다고 해서, 나에게 말하길 주저하면 안돼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우리는 가장 좋은 상황인 것 같아요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When no one is around then I have you here
I begin to see the picture, it becomes so clear
You always have the biggest heart
When we're 6.000 miles apart

아무도 주위에 없을 때 이곳의 내겐 당신이 있어요
내게 그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고, 무척이나 분명해져요
항상 마음을 크게 가져줘요
우리는 6000 마일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지 만
(*6000마일이면 약 9656km이다. LA에서 뉴욕까지가 대략 4450km이다-옮긴이 주)

Too much of no sound
Uncomfortable silence can be so loud
Those three words are never enough
When it's long distance love

아무런 소리가 없는게 심해지면
불편한 침묵은 굉장히 시끄러울 수 있어요
단지 세 마디 말론 절대로 만족스러울 수 없어요
장거리 연애를 한다면
(*세 마디 말은 I Love You 가 아닐까 - 옮긴이 주)


Always love me more, miles away
I hear it in your voice, miles away
You're not afraid to tell me, miles away
I guess we're at our best, miles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멀리 떨어져있지만, 항상 나를 더욱 사랑해줘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내가 당신 목소리에서 사랑을 들을 수 있게
멀리 떨어져있다고해서, 나에게 말하길 주저하면 안돼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우리는 가장 좋은 상황인 것 같아요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I'm alright
Don't be sorry, but it's true
When I'm gone, you realize
That I'm the best thing that happened to you

난 괜찮아요
슬퍼하지마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내가 떠나면, 당신은 깨달을 거에요
당신에게 일어났던 일 중에 내가 최고라는 걸요

You always love me more, miles away
I hear it in your voice, miles away
You're not afraid to tell me, miles away
I guess we're at our best, miles away

멀리 떨어져있지만, 항상 나를 더욱 사랑해줘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내가 당신 목소리에서 사랑을 들을 수 있게
멀리 떨어져있다고 해서, 나에게 말하길 주저하면 안돼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우리는 가장 좋은 상황인 것 같아요

You always love me more, miles away
I hear it in your voice, miles away
You're not afraid to tell me, miles away
I guess we're at our best, miles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멀리 떨어져있지만, 항상 나를 더욱 사랑해줘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내가 당신 목소리에서 사랑을 들을 수 있게
멀리 떨어져있다고 해서, 나에게 말하길 주저하면 안돼요
멀리 떨어져있지만, 우리는 가장 좋은 상황인 것 같아요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so far away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감상을 재미없게 만드는 잡설

가사의 6000마일이나 뮤직비디오, 그리고 밝은 목소리 때문에 왠지 해외 팬들에게 바치는 그런 노래가 아닌가 소설을 써 봅니다.

Posted by 김탁구
번역2014. 2. 3. 22:36

*본문에 앞서*

-로빈 우드의 [Hitchcock's Films Revisited]에 실린 1편 서문(1965)을 옮겨보았습니다.  그냥 취미로 한 것이며, 언제 수정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역 및 오타 지적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본문에 첨부된 모든 이미지는 본문에는 없으며 옮긴이가 임의로 게재하였음을 밝힙니다.


*본문 시작*


[히치콕의 영화를 다시 만나다(로빈 우드)], 1편 서문


서문(1965)

 

왜 히치콕을 진지하게 여겨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해야만 한다는 게 유감스럽다. 만일 영화가 소설이나 희곡의 단순한 부속품이 아니라 진정 자율적인 예술로 여겨진다면,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영화를 문학으로 격하시키는 대신에 영화를 보게될 수 있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상황을 보건대, 이 질문에 맞닥뜨리지 않고는 히치콕에 대한 책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히치콕은 지속적으로 순수 영화에 대한 그의 믿음을 설파해해왔고,  그의 영화의 진가를 알기위해서는 영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통상 테크닉으로 의미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의미를 이야기하고 싶다.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니(Marnie)>에서 마크 루트랜드(숀 코너리)는 스트러트(마틴 게이블)에게 돈도 되찾았으니 강탈당한 것 가지고 마니를 고소하지는 말라고 설득하려한다. 스트러트는 자신에게 보여준 관대한 태도를 세련됐다고 일컬으며 당신이 희생양이 될 때도 그런가보자고 반대한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마니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다. 이제 막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조금 전에 아끼는 말을 쏘아야만 했고, 손엔 여전히 권총이 들려있다. 제정신이 아니다. 자유의지도 없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다. 이를 이미지로부터 유리시킨 채 문학에서의 내용과 같은 지위로 격하시킨다면, 그러니까 이미지의 움직임이나 이미지에서 이미지로의 움직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별로 중요한 점은 없다. 꽤나 혐오스러운 남자가 불쌍한 여주인공에게 해코지를 꾸미고 있다는 뻔한 극적 상황밖에는 남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명을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힘과 비교해보자. 우선 스트러트로부터 마니로 넘어가는 편집은 스트러트의 말인 희생양이 되다  반어적인 평을 한다. 스트러트는  평온하고, 독선적으로 보인다.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관대함이 결여된 이 남자는 엄격하고 표준화된 도덕성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그러고나면 마니가 보인다. 초췌하고 핼쓱하며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총을 꼭 쥐고 있다.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다. 몽유병 환자처럼 앞으로 걸어가는데, 복잡한 과거 전반으로 보아 말 그대로 희생양이 된 상태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스트러트의 도덕적 태도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태도를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스트러트 그 자신에 대한 평가이자 그가 대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평가이다(영화에서 그는 자주 서 있는데, 삶과 사회적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색채도 중요하다. 마크는 갈색 무늬의 트위드 옷을 입었고 갈색 타이를 맨다. 때문에 갈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장식된 루트랜드의 저택 그러니까 자연(natural)”의 색과 자연스럽게 조화된다. 스트러트가 맨 타이의 뻣뻣한 파랑색은 그가 앉아 있는 소파의 초록색과 충돌한다. 그러한 실내장식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루틀랜드적인 배경에서 스트러트의 삶에 대한 태도가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핵심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느낀다.

         소설가도 위와 동등한 것을 전달할 수는 있다. 동일한 문장 전체를 통해 반응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가 연쇄되는 상황에서처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소설가는 제 때에 맞으면서도 가장 적절한 반응을 통제해낼 수는 없다. 소설가는 스트러트가 앉아있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러트가 앉아있는 정확한 그 방식을 보여줄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제 각각으로 상상한다. 소설가는 우리에게 일정한 거리를 주어 약간의 앙각(low angle)으로 스트러트의 거북스런구석, 제스쳐, 표정의 변화를 관찰하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그가 옹고집을 부린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텐데 말이다. 소설가는 마니의 외양을 묘사하고 그녀의 감정 상태를 내적으로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히치콕은 그렇게 할 수 없겠지만). 하지만 표정, 행동방식을 보여줄 수 없다. 우리를 그녀 앞에 위치시켜서 그녀와 함께 그녀의 속도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녀의 행동 리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그녀가 보여주는 일종의 트랜스 상태를 잠시나마 공유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가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히치콕은 우리가 정확하게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맥락 상 눈에 잘 띄지 않는 예를 선별했다. 여기에 표나게 영화적인 구석은 전혀 없다. 이런 장면은 <마니>의 어떤  시퀀스에서라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장면은 히치콕의 최근 작품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부분적 실현의 대표적 표본에 알맞은 것으로 보인다. “순수 영화적 측면에서 주제가 실현되는 것의 표본으로 말이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은 그 특별한 순간에 그 주제가 표현되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지성으로 분석하는 대신 경험을 하게 된다.

         <싸이코(Psycho)>의 한 지점을 생각해보자. 노먼 베이츠가 어머니를 데리고 지하 과일 저장고로 내려가는 순간이다.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청년이 축 쳐진 시체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가 몇 계단 내려간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자면 복잡한 카메라 움직임이 결부된 부감 쇼트는 히치콕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 순간 필요로 하는 형이상학적 현기증의 감각(sense of metaphyisical vertigo)을 정확히 전달한다. 불확실성이라는 유사(流沙) 속으로 침몰하는 감각이랄까 끝없는 구덩이로 빠져드는 감각을 전달한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그 행위와 관계된 특정한 지점에 우리가 위치해보고 배우의 행동과 관계되는 선에서 우리의 행동이 통제됨으로써 그러한 감각을 느껴보는 것이다. 영화는 그 나름만의 방법과 영역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다가 다른 예술 장르를 경험할 때 썼던 가정들을 응용하다가 쇼트와 시퀀스의 의미를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영화,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는 상업 매체이다. 히치콕의 작품들은 대개는 대중적이다. <이창(Rear Window)>이나 <싸이코>처럼 그의 최고작 중 몇몇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었던 작품에 속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의 최고작들이 아무리 재기넘치고,”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즐겁고,” “흥미롭고뭐 기타등등 어떻다고 해도 그 작품들을 진지하게 볼 수야 없다는 억측이 만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베리히만이나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볼 때처럼 진지하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엄숙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히치콕의 최고작들은 완전히 나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박스 오피스(the box office)에 양보하는태도 전체를 천박한 대중적 취미와의 치명적인 타협이라고 쉽사리 말 한다. 히치콕이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로 계속해서 회귀하는것, 그 과정에서 배우로보다도 일단 유명인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스타들을 대개 기용하는 것.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강한 유머의 요소들이 있는 것. 심각한 톤을 지속시키는 어떠한 성향이라도 효과적으로 누그러뜨려주는 개그희극적인 전환이 있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주로 문학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반감은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상업적인”, 따라서 지적으로 논할 가치가 없는 매체를 떠올리라면 누군가는 엘리자베스시대의 연극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저속한 희극적 톤이 작품의 비극적 분위기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맥베스(Macbeth)]에서 짐꾼 장면을 삭제하려 했던 편집자들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존슨 박사가 셰익스피어가 신소리나 공상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로버트 브릿지가 [법에는 법으로(Measure for Measure)]와 같은 희곡의 저속한 장면들에 대해 개탄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테다. 이 모든 사례에서 논지는 근본적으로 대개 비슷하다. 셰익스피어는 저급한 관객들을 단지 만족시킬 작정으로 고귀한 진지함으로부터 유감스럽게도 일탈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도 용납할 수 없다면, 아마 그런 구절들은 다른 누군가가 끼워넣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스스로를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완벽하다고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고, 히치콕이 그렇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많은 셰익스피어 비평들에 대한 반대 의견과 마찬가지로, 사실 히치콕에 관해 프랑스인들이 쓴 오늘날의 수많은 상세한 평가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의견은, 글쓴이들이 자신의 위인(hero)은 어떠한 잘못을 범해서도 안 된다는 가정에서 출발을 하며 서로 다른 작품 간에 꼭 행해져야 할 구별도 자주 해내지 못하고, 이따금씩은 글 내에서 자신들이 이해를 못했음을 시인하는데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무척 해롭다. 예술가와 관객 사이에 허물기 매우 어려운 담을 쌓기 때문이다. 무비판적 찬양으로 예술작품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셰익스피어나 히치콕이 폭 넓은 대중 관객들과의 생동적인 접촉을 통해 그들의 작품이 산출해내는 바로 그 풍부함을 잃기를 바라지 않는다. 히치콕의 영화가 베리히만이나 안토니오니의 영화 같기를 바라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코르네이유와 같았더라면 하고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이것이 18세기 비평가들이 정말 바랬던 것이기는 하다).  이러한 말로 코르네이유를 무시하려는 뜻은 없다(베리히만이나 안토니오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코르네이유는 셰익스피어가 줄 수 없었던 경험을 제공한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더욱 풍부한 경험을 줄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고, 만약 셰익스피어와 히치콕으로부터 대중적매력의 흔적들을 어떻게든 제거해버린다면, 셰익스피어도 히치콕도 잃게 되리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히치콕의 관객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두 작가의 작품 사이에도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물론 나는 그러한 지점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할리우드는 엘리자베스시대의 런던처럼 위대한 예술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 수 많은 이유들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양보이니 타협으로 주장되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된 지점에서 접근해보아야 한다. 일전에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Rio Bravo)>에 대해 극찬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곧 바로 그 영화는 매우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혹스가 대중가수(릭키 넬슨)를 기용해서 별 이유없이 그에게 노래를 시킬 목적으로만 노래 시퀀스를 끼워넣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분명 그 질문자는 영화의 맥락상 노래하는 장면 자체가 주는 이점을 고려할 생각은 못해 보았을 것이다(주제의 통일성 측면에서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이 장면이 [겨울이야기(The Winter’s Tale)]에서의 오토리쿠스의 역할 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그 장면이 누군가 보기에는 <리오 브라보>의 노래 시퀀스가 혹스를 기쁘게 한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마음을 기쁘게 한 대중의 취미에 대한 굴복을 대표한다고 해도, 오늘날에는 누구도 그 장면이 사라져버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히치콕이나 혹스가 자신의 작품과 맺는 관계는 베리히만이나 안토니오니가 자신의 작품과 맺었던 관계보다는 셰익스피어가 맺었던 관계와 훨씬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니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소통함으로써, 오늘날의 예술을 장악하고 있는 예술가의 자의식은 배제해버리고  진정한 예술적 무개성(artistic impersonality)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내가 히치콕을 대신해 바라는 전부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반응하도록 내버려두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반응을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예컨대 <현기증(Vertigo)>을 단순히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가정하지 말자. 그렇게 하는 것은 영화 감상을 망친다. 영화의 2/3 지점에서 해결책이 은밀하게 드러나고 나면 나머지 부분은 지루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 대신에 히치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연쇄적인 이미지들을 선입견 없이 보고, 그 이미지들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을 숙고해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한다면 영화가 가장 밑바닥에 숨겨둔 의미에 곧장 신속하게 이르게 될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 대한 영국의 비평 대부분을 망치는 정확한 이유가 이처럼, 보고, 반응하고, 그리고 숙고하는 것을 거부하는 데 있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Sight and Sound)] 1963년 가을 호에 실린 페넬로피 휴스턴의 융단속의 무늬(The Figure in the Carpet)”라는 기사를 보면 "주류"적 경향의 특징이 꽤 잘 표현되어있다. 기사의 직접적인 동기는 <(The Birds)>가 영국에서 개봉됐기 때문이다. 기사는 실제로 큰 특색이 있는데, 히치콕에 대한 견해적 측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비평 접근법 일반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몇몇 세부사항에 있어서는 대표적 사례로서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이 지면에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몇몇 논평들은 적절해 보인다. 기사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특성이다. 휴스턴은 피상적으로 에릭 로메르와 클로드 샤브롤의 히치콕에 대한 저서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 실린 장 두셰의 기사에 나타난 고려할 가치 없는 분명히 과잉된 지점들에 대해 진단한다.  누군가는 명백히 긍정적인 지점을 찾는데 반해, 누군가는 철저히 아무것도 못 찾기도 하는 법이다. 휴스턴은 "(히치콕)은 거장이라는 일반적인 합의"를 그녀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를 뒷받침하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말하려하지는 않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비평의 책무를 회피한다. 결론을 내리는 데 있어 엄밀하게 질문하는 어떠한 경향도 따르고 있지를 않다. <현기증>에 관한 내용을 보면(요새 들어서는 휴스턴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비록 왜,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을 지라도 말이다), "최면을 거는 것과 같다... 초반부는 유속이 느린 물 아래에서 꿈을 꾸듯 흘러간다. 후반부는... 악몽과도 같은 환각적인 성질을 가졌다. 영화의 끝 무렵에, 관객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미쳐 보이는 만큼이나 미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만약 "환각적 성질"에 대해 그것의 방법이며 목적 그리고 도덕적 함의(선인지 악인지, 고의적인지 비고의적인지)를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면, 휴스턴으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얻을 수가 없다. 어떤 영화가 "환각적 성질"을 가졌다고 한다면 모호하게나마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휴스턴의 기사는 두 가지 기반에 근거한 듯한데, 둘다 비평적으로 최소한의 요건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히치콕이 말한 것과 이러저러한 영화에서 히치콕의 의도였으리라고 그녀가 추정하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그녀는 절대로 영화 자체에 관해 서술한 일차 연구에 근거하지 않는다. <>에 관해 쓴 글의 마무리 문단이 대표적이다. "...만약 <>가 정말 종말의 날에 대한 환상으로 의도된 것이라면, 나로서는 그 의도가 유감스럽게도 부적절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 왕으로서든, 곰 아저씨 푸로서든, 청어 두 마리로서든 "정말로 의도되었다면", 최소한 똑같이 부적절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비평가에게 중요한 것은 혹은 중요해야만 하는 것은 영화가 무엇을 "실제 의도하고" 있는 가가 아니라 영화가 실제로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또한 휴스턴의 발언에는 "종말의 날에 대한 환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일련의 개념을 수반하고 있다. 어찌됐건 손쉬운 클리셰 딱지를 이용하여 깔끔하게 포장하고 묶어버리려는 욕망에 그녀가 <>와 같은 복잡한 작품을 다룰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난다.  "...그런데 새를 폭탄이나, 잠재의식이 만들어낸 괴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애초에 전혀 다른 측면에서 시작하여 티피 헤드런을 마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왜 안되겠어요! 미스 휴스턴, 어서 해봐요! "...누구든 위의 경우의 수 중 어떤 것에 대해서건 꽤 그럴듯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다만 이 영화에 대해 1분이라도 고려해 본다면 누구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충분히 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맞는 소리다)"...그러니까 히치콕의 의도가..."(또 다시 의도라니!)"...요컨대 보다 단순한 것이라는 확신만 떨쳐낼 수 있다면 말이다. <싸이코>를 통해 히치콕은 우리가 베이츠의 모텔처럼 외따로 떨어진 건물에서 묵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재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러한 짓을 <>에서 한 번 더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던대로 즐거이 갈매기에게 빵을 던져줄 것이다. 왜냐하면 <>는 한 번에 충분히 오랜 시간동안 우리의 불신의 장벽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휴스턴의 확신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휴스턴의 확신이라는게 <>를 보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싸이코>가 나를 공포스럽게 했던 것만큼 혹은 정확히 그 방식으로 나를 공포스럽게 하는가? 바로 이 척도에 의하여 <>를 심판하는 것이다. "...자신의 관심사는 이야기의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 나가는 그 과정에 있다고 우리에게 그렇게 자주 말했던 감독은, 그 자신의 평가법에 따라 그를 맞이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누군가는 예상했겠지만, 제대로 된  비평가라면 누구나 거절해야만 하는 그 초대장은 공손하게 웅얼거릴 것이다. "절대 예술가를 믿지 말라. 믿을 것은 이야기다."  몇 가지 기벽만 갖춰지면 감독을 거장으로서 묘사하는게 합당하며 이러저러한 영화가 무엇을 하느냐에 대해서는 물을 필요가 없다고 보는 가정이 명백히 깔려있는 이 평론 전반은, 딜레탕티즘의 전형이고 이것이 영국 영화 비평을 그렇게도 망치고 있는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를 엉뚱하게 보느니 차라리 히치콕의 영화가 도덕적으로 거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존경받을 만하다. 최소한 그들의 태도는 예술작품 혹은 오락작품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힘이 있고 따라서 작품을 평가하기에 앞서 작품을 세부적이고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혹은 패디 화넬식으로 말하자면 양식에 새겨진 가치를 끄집어내야할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측면을 고려하는 일(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의미가 저하되지 않는다면, 현실 참여라 부르고 싶다)의 필요성을 이렇듯 별 의견 없이 무시하는 것은 충격적인 가치의 혼란(혹은 부재?)과 어떤 형태에서 연결되며, 이 점은 피터 존 다이에가 <마니>에 대해 경멸적으로 비평한 글(또 다른 흥미로운 대표 사례이다)이 실린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어느 호가 역시 "최신 영화 안내(Guide to Current Films)"라는 꼭지에서는 <골드핑거(Goldfinger>에 별 세 개를 선사했으며("[사이트 앤 사운드]의 독자들에게 특별히 인기있었던 영화들에 대해 한 개에서 네 개의 별을 매기는 꼭지." 대체 [사이트 앤 사운드]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캐릭터를 먹칠 하는 그런 작품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로저 코만이 베르히만을 표절하고는 젠채했던 <붉은 죽음의 가면(The Masque of the Red Death)>이라는 천박한 작품에 대해 다이에가 쓴 찬사글을 게재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생각컨대 사람들이 히치콕의 작품을 진지하게 평가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요한 이유는 평가에 대한 히치콕 자신의 태도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내어 그것이 평가와는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해야겠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한 바가 다른 누가 작품에 대해 말한 바 보다 반드시 더 중요한 무게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작품에 대한 말의 가치는 모든 비평과 해설을 종속시킬 수 있는 기준에 의해 오로지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란  예술작품을 이해하거나 평가하는데 그 말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물으면서 그 말을 예술품에 적용해보는 일을 뜻한다. 예술가 스스로의 발언은 그의 개성이나 세계관에 대한 어떤 깊은 이야기인 탓에 간접적인 관련성을 갖기가 훨씬 쉽다. 히치콕은 어느 정도가 됐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진지한 단계에서의 논의를 하는 것을 미칠 듯이 싫어하며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로서는 이러한 태도에 감복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창작자는 영화라는 증거 외에 자신의 예술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는 유쾌하게 겸손하며 젠체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히치콕은 그러한 일을 평론가들에게 맡긴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지 그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태도는 [영화 6(Movie 6)]에 실린 인터뷰 중 아주 인상적인 순간에서 잘 묘사된다. 히치콕은 그의 후기작의 주제적 "확장"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 덜 추상적이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경향인 것 같아요. 이건 후기작 모두를 면밀히 보고 있는 트뤼포 씨의 견해입니다. 트뤼포 씨가 보기엔 미국에 와서 찍은 작품들이 영국 시절 작품들보다 훨씬 강렬하대요." 그는 위대한 예술가 중에 가장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 스스로가 분명히 충분하게 드러내는 창조의 기쁨은 그에게 예술가적 거만함이 전혀 없다는 사실과 함께 동반된다. 이에 셰익스피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셰익스피어 역시 최고의 걸작들을 제작자나 배우의 수중에 맡기고서 즐거워했으며 우리가 아는 한 걸작들 중 몇몇을 인쇄된 형태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적조차 없었다. 창작 과정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보상이며, 그 자체로 타당한 이유인 것이다.

         영국에서 프랑스의 히치콕 비평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해서 그닥 더 기쁜 것도 아니다. 에릭 로메르와 클로드 샤브롤의 선구적인 작품은 존중받을만 하다. 히치콕에 대한 그들의 책은 히치콕의 작품이 마음에 환기시키는 반향들을 설명하려는 매욱 진지한 시도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책에 제시된 수 많은 뛰어난 견해나 작가들이 히치콕 작품의 도덕적 성질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경탄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다루는 바가 히치콕의 전부라면 저자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에 뒤따라 '아니야, 이건 히치콕의 전부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기에 더러는 불만족스럽기도 할 것이다. 저자들은 150쪽에 걸쳐 <오인된 사나이(The Wrong Man)>에 이르기까지 영국 시절과 미국 시절 히치콕 작품 40개 이상을 모두 망라하는데, 그들의 분석은 영화로부터 살과 피를 모두 발라내어서는 그들을 이론적인 골격으로 저하시킨다.  이러한 기획의 저변에는, 작가들이 히치콕을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만들고자 했음이 깔려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서스펜스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를 경시하고, 각각의 영화들을 발가벗겨서 단조로운 지적 원리(intellectual postulate)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의미하는 그러한 것들은 휴스턴이 "융단 속의 무늬"에서 <열차 위의 이방인(Stranges on a Train)>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인용한 구절에 잘 제시되어 있다. "히치콕의 작품은 신비주의적(esoteric)인 회화나 시를 대할 때와 꼭 같은 방식으로 고려되어야만 한다. 전체로 통하는 열쇠가 항상 문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리고 바로 그 문 자체가 교묘하게 위장된 것이라고 해도,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외칠만한 이유는 없다."  엄청난 오해이다. 히치콕 영화에서 의미는 "오락"이라는 위장 아래에 교묘하게 감추어진 신비주의적인 무엇이 아니다. 의미는 쇼트에서 쇼트로 넘어가는 기법과 과정에 있다. 히치콕의 영화는 매 세부사항 속에 전체가 함축되어 있고 매 세부사항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스펜서의 말을 빌려보자.

         영혼은 육체의 형상을 취하고,

         영혼은 형상이며 육체를 만드나니.

만약 우리가 예술품에서 그것의 육체에 표현된 "영혼"을 찾을 수 없다면, 사지에 생명을 주고 불어넣는 "영혼"을 찾을 수 없다면, 찾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로메르와 샤브롤의 책은 영화를 경험주의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문제점을 보인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테제를 미리 결정해놓았으니 영화는 어떻게든 그것에 맞게끔 만들어져야만 한다. 히치콕의 영화가 기독교적인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창(Rear Window)>의 의미는 "기독교의 교의를 정확히 참조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창>은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예술작품은 자족적이어야만 하고, 이 때 작품의 의미는 작품 부분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1]*[1] 물론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고 샤브롤과 로메르는 <이창>을 완전히 오독하기에 이른다. 에컨대 그들에 따르자면, <이창>의 마지막 쇼트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레이스 켈리가 "마치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변함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도입부에서 스튜어트는 켈리와의 관계를 깨려는 상황에 놓여있었지만, 종반부에 가서는 약혼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스튜어트의 등은 창가를 향해있다.[2] , 로메르와 샤브롤에 따르자면, <이창>은 호기심을 직선적으로 비난한다. 이상하고 모호한 비난이다. 이 비난에 따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떠나야 한다. 영화라는 장르는 다른 사람의 창문을 열광적으로 훔쳐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결국에는 호기심 덕분에 아주 무시무시한 살인 사건이 밝혀졌고 한 여자의 자살을 막을 수 있었다. 선과 악이 이리저리 뒤얽힌 느낌으로 가득한 히치콕의 도덕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카이에 뒤 시네마] "히치콕의 세 열쇠(La Troisieme Clef d'Hitchcock)"란 이름으로 실린 장 두셰의 기사는 과장된 해석과 또 다시 사태를 추상적으로 격하시킴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 걸쳐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마지막 회분의 기사에서 <이창> <싸이코>에 대한 설명이 그러했다([까이에 뒤 시네마], 113). 두셰는 히치콕의 대중성이나 그의 서스펜스 테크닉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지점이 그의 논의의 시발점인데도 말이다. 그 역시 하나의 접근법을 따르려는 고정된 틀을 사용함으로써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창>에서 안뜰 너머의 아파트가 일종의 영화 스크린으로 기능하여 제임스 스튜어트가 그 위에서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소원-충족"한다는 그의 견해는 아주 인상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논의의 끝 부분으로 가면 살인자가 실재(real)하는 여자를 죽인 실재하는 인물이고, 교외에 실재의 사지를 묻었으며 실재하는 화단에 실재의 머리를 파묻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두셰가 흑 주술을 고집하는 것은, 실제로 처음에는 흥미롭지만, 결국 히치콕 영화의 의미를 다소 진지하게 제한시켜버리는 것 같다. 히치콕이 관객의 반응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관점에서 <싸이코>를 다룬 그의 글은 세부사항들에 관한 것들에는 동의할 수 없음에도 탁월하다. 하지만 그 글은 영화의 복잡한 측면 중 한 가지 만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두셰의 글은, 그리고 로메르와 샤브롤의 책은 지적이고 비평적인 엄밀함의 측면에서 영국의 "주류" 비평을 단연코 앞선다. 때문에 혹자는 그들에게 어떤 비판을 개진하는 것을 유감스레 여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들이 미친 소리를 할 때에도 "주류"파의 타당성이 지독히도 사소하다는 점에 비교한다면 훨씬 지적(知的)으로 보인다. 히치콕의 영화를 설명하는 데에 흑 주술이나 "기독교 교의에 대한 정확한 참조"를 사용하는 일이 끼치는 최대의 해악은 그 영화가 그러한 기반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것이냐는 연관된 의혹에 빠뜨리는 것이다.


 

         의혹을 반박해보자. 그러나 이 글을 열며 던졌던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일단 모든 잘못된 선입견이 제거된 후에 히치콕이 예술가로서 진지하게 고려될 만한 가치가 있노라고, 의심자들이 확실히 믿게끔 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세부적인 분석을 통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는 진술과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이후의 장에서 제공하도록 하겠다. 그 전까지는 회의적인 독자들에게 나의 주장을 염두에서 떨치지 말고 가지고 있으면서 아래와 같은 정당화 시도에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

         먼저, 히치콕 작품의 통일성과 그 통일성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그가 빈번히 자신의 이야기감을 다루는 데에 미스터리 스릴러로 회귀했다는 사실보다 훨씬 중대한 무언가를 의미한다. 또한 이는 특별한 주제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죄의식의 교환"과 같은 특별한 주제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사실보다 더 폭 넓고 복잡한 무언가를 의미한다. 물론 이들이 부분 요소이기는 하다. 히치콕의 성숙기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주제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양식이나, 기법, 도덕적 태도, 삶의 본질에 대한 전제적 측면에서도 착실히 발전하고 원숙해지며 명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 전체는 일종의 통일성을 보인다. 이안 플레밍의 작품 뿐만 아니라 애거서 크리스트의 작품도 그렇고, 심지어 에니드 블리톤의 작품도 그렇다. 그러나 착실한 발전과 원숙함은 중요한 작가와 별 볼일 없는 작가를 구분하며, 중요한 작가라는 표식으로 보인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히치콕의 경력을 통틀어 보자면 확실히 가속도적인 발전 과정을 보였다. 그 정도의 비율이라면 비평가가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 내에서 그의 작품은 놀라울만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마땅히 강조되어야함에도 거의 강조되지 못하고 있는 히치콕의 위업의 또 다른 표식이다. <염소좌 아래에서(Under Capricorn>와 같이 명백하게 다른작품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저 히치콕이 7년내에 만든 최근 다섯 작품을 생각해보자.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싸이코>, <>, <마니>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접점이 많다. <현기증> <싸이코>에서 동일시(同一視) 테크닉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을 제한하여 잠시동안 단일한 의식의 경험을 공유하게 했던 것. <싸이코>에 등장했던 새와 영화 <>. <싸이코> <마니>의 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테마. 이 다섯 작품의 치유테마.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각각의 작품이 톤, 양식, 주제가 되는 대상, 기법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다섯 작품이  단일한 독창성을 표현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작품들 간에 반복은 없다. 각각의 작품은 관객들이 각각 다른 접근법을 취할 것을 요구한다.

         히치콕 작품의 제재는 흔히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 한 번도 자기만의 플롯을 개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다른 이들의 작품을 각색했을 뿐이다. 여기서 또 다시 셰익스피어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히치콕이 원작 때문에 제한을 받았다면 그것은 꼭 셰익스피어가 제한받은 만큼인 것이다. 그린의 로맨스 [판도스토(Pandosto)]를 위대한 운문 드라마 [겨울 이야기]로 각색하는 과정은 브왈로와 나르스자끄의 [죽은 자들 사이에서(D’entre les Morts] <현기증>으로 변한 과정과 다르지 않다. 꼭 같은 관계인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린의 플롯에 변화를 준 만큼 히치콕도 브왈로와 나르스자끄의 플롯에 변화를 준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시(poetry)를 통해, 히치콕은 미쟝센을 이용하여 변화를 주었다. 이것은 단지 장식의 문제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시는 그린의 플롯에 대한 장식이 아니라 진정한 매체로서, 플롯을 유기체적 운문 드라마의 구조로 흡수하는 수단인 셈이다. <현기증>에서 히치콕이 보여준 미쟝센에도 정확히 같은 말이 적용된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소재를 변형하는 것이 처치곤란한 요소를 남기는 일 없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에겐 [심벨린(Cymbeline)]이 그랬고 히치콕에게는 <망각의 여로(Spellbound)>가 그러했다. 이러한 경우, 예술가들은 훗날에 처치곤란한 요소는 없으면서 밀접하게 연관된 소재를 택하여 더욱 풍성하고 유기적으로 다뤄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탓에 셰익스피어는 [겨울 이야기]를 썼고, 히치콕은 <마니>를 만든 것이다(비록 히치콕이 이전 작품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미스터리 스릴러의 요소가 히치콕 최고작들의 중심요소인 적은 없었다. 그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을 부인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해볼 수 있겠다. “서스펜스는 작품의 주제라기 보다는 기법에 속한다(어떤 구별이 가능하는 한, 유기적인 작품에 적용되는 그러한 구별은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이다). 히치콕의 최근작 어떤 것이든 유심히 살펴 본다면 작품의 핵심, 그러니까 작품이 구성되는 기반 축은 항상 남녀관계(man-woman relationship)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애상대가 누구냐는 식으로 임의적으로 다뤄지는 게 아니라, 본질적인 주요 소재로서 다뤄지는 것이다. <오명(Notorious)>, <현기증>, <마니>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창>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경우에도 정확히 마찬가지다. 명백히 예외인 것처럼 보이는 <싸이코>는 노먼 베이츠가 정상적인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성적인 함의와 뉘앙스로부터 영화의 힘 대부분을 이끌어낸다. <밧줄>의 매혹적인 부분들은 대개 두 살인자 간의 모호한 관계로부터 이끌어진다. 모든 행위는 억눌린 동성애적 긴장으로부터 발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일부 예외인 것처럼 보이는 <열차 위의 이방인>은 영화의 중심 애정 관계가 더욱 확실하게 이해된다면 더욱 완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같은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고백한다(I Confess)>의 실패는 주인공이 신부라는 사실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흥미로운 시퀀스가 그의 과거 연애지사를 다루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충분히 성실하게 찾으려고만 한다면야, 어느 작품에서나 그 기저에 깔린 심오한 주제를 찾아낼 수 있다. 주제를 곰곰이 따져보았더니 "내용"만이 아니라 기법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특징지우고 있다면, 그 작품은 예술작품이 된다(물론 연출(treatment)과 독자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있기나 할 때의 얘기이긴 하다. 소리와 이미지를 제외한다면 영화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며 영화의 양식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현기증> <싸이코>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면, 심오하며 보편적 의의가 있는 주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러한 주제들은 뽑아낼 수 있는 어떤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과 양식에도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히치콕의 <현기증> 속 소재(부알로와 나르스작과 구별되는)는 단순히 미스터리 스릴러의 속임수(trickery)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한 편으로 보자면 미조구치의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와 유사성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보자면 키츠의 라미아(Lamia)”와 유사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작품들을 끌어들임으로해서 그것들의 도움을 얻어 <현기증>을 존경받도록 만들고자 함이 아니다. “AB와 유사하다 그러니까 AB만큼 훌륭하다와 같은 교묘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현기증>을 위해서는 그러한 부정직한 변호를 할 필요가 없다. 각각의 작품과 비교하더라도 두려울 게 없다(형식적인 완성도 뿐만 아니라 이해의 성숙도나 깊이 면에서도, <현기증>이 미조구치의 작품 보다 확실히 우수한지는 따져봐야겠지만, 키츠의 시 보다는 단연코 우수하다). 단지 독자들이 주의를 기울일 대상은 히치콕의 영화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다. 부알로와 나르스작의 장점과 결점은 <현기증>과 무관하다. 그린의 장점과 결점이 [겨울이야기]와 무관한 것처럼 말이다.

        아마 서두 질문에 답을 하는 더욱 실용적인 방법은, 히치콕의 많은 작품들 내의 불편하게 하는(disturbing) 특성을 지적하는 일일 것이다.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의 기능 중 하나이다. 우리의 평정심을 꿰뚫고 그 기반을 침식하여 개념을 정립하고, 그에 따라 삶에 대한 태도를 재조정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히치콕으로부터 이러한 특성을 언급하지만 이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떠한 영화가 매우 기민하지만 입에 불쾌한 맛을 남긴다는 평을 받겠는가(<열차 위의 이방인>,<밧줄>,<이창>…). “불쾌한 맛을 남기는 현상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주요한 이유를 가졌다. 하나는 히치콕이 복잡하며 이리저리 뒤얽힌 도덕관(moral sense)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 도덕관에서는 선과 악이 뒤섞이어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으며, 그 도덕관은 우리 모두의 안에 사악한 충동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 불순하다는 것을 완전히 의식적인 층위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알게하는 그의 능력일 것이다(그 층위는 관객에 따라 다르다). 당연히, 두 가지 요인은 대개 결합되어 작동한다.

         불편하게 하는 특성은 히치콕의 서스펜스와 빈번히 관계를 맺는데, 이 지점을 이제부터 생각해보고자 한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매우 훌륭하면서 간단하다. 그러니까 매우 잘 만들어진 단순한서스펜스이다. 그럼에도 정의하기가 여간하지 않은데,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다 여러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어둠과 빛이라는 두 신비적(occult) 힘 가운데 사로잡힌 영혼의 정지(suspension)”라는 장 듀셰의 정의는 비록 영어보다는 프랑스어에서 구절 중 일부가 더 낫게 들리겠지만, 너무나 추상적이고 일반화되어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 비평(practical criticism)” 중에서 분명하면서도 이해를 돕는 두 가지 예제를 살펴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첫째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농약살포비행기 시퀀스를 <러시아에서 사랑을 담아(From Russia with Love)>의 헬리콥터 공격 시퀀스와 비교해보도록 하자(둘 사이에는 꽤 분명한 관계가 있다). 몇몇 독자들에게는 질적 차이가 너무나 크고 명백해서 비교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비교의 목적은 나쁜 영화를 쉽사리 깔아뭉개는 데 있는게 아니라, 히치콕 서스펜스의 특성을 정의하고자 하는 데 있다. <러시아에서 사랑을 담아>가 히치콕이 널리 그러한 혐의를 받았던 것처럼 천박한 대중적 취미에 영합한 정확한 본보기라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가장 적대적인 평론가라 할지라도 그 영화의 섹스와 폭력의 남용을 히치콕의 어떤 영화건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 영화는 우리를 붙들 필요가 거의 없다. 헬리콥터 시퀀스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몇몇 손 쉬운 스릴을 제공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대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만약 그런게 있기라도 한다면) 히치콕의 시퀀스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하게 우수하다. 히치콕의 시퀀스가 훨씬 더 능숙하게 예비되었으며, 훨씬 더 세심하게 찍혔으며, 모든 쇼트가 시퀀스의 발전과 연관되어 정확하게 판단되었다. 섬세함과 정확성은 그 자체로 강력한 긍정적인 특성이다. 비교컨대, 본드의 시퀀스는 지저분하고 엉성하며, 연출은 순전히 기회주의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서스펜스" 시퀀스를 구축하는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논의해야 한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서스펜스는 그 자체로 남다른 체계를 갖췄다는 점을 다뤄야 하는 것이다. 본드의 시퀀스는 의미가 없다. 공격은 단순한 공격일 뿐이고, 그 공격이 그 시점에 그러한 방식으로 본드에게 일어나야만 하는 플롯 상의 이유 외에 주제적인 이유가 없다. 본드 캐릭터에 대한 영향이 없는 것이다. 서스펜스는 오로지 '그가 죽을까 말까?'라고 하는 질문 덕에 형성된다. 그리고 (a)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b)그가 죽는다는 점을 신경쓸만한 그럴듯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 장면의 서스펜스는 순전히 신체적인 흥미를 넘어서는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농약살포비행기 시퀀스는 영화의 전개와 본질적인 관련을 갖는다. 침착하고 자신만만하던 캐리 그랜트의 캐릭터가 이 장면에서 탁 트인 교외로 내던져진다. 정보기관의 임시적인 보호와 칵테일 바로부터 멀리 떨어져 협박과 예측불가능한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던 남자가, 이제는 숨을 곳을 찾기 위해 허둥대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달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는, 그리고 그가 속한 세계에서 그를 똑똑하며 매력적이라고 여겼던 우리는 광활하고 어쩌면 험난할 지도 모를 우주에서 그 개인의 미미함을 떠올리게 된다. 이 시퀀스는 캐릭터와 캐릭터의 인간관계의 발전과 그를 통한 영화 전체 주제의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단계가 된다. 만약 그 캐릭터가 매력적이지 않다면, 그의 모든 결점들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가학적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별로 정이 가지않는 남자가 도주를 하는 광경에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우리를 충분히 동일시하게 되고 우리의 서스펜스는 그의 곤경에 대한 상충되는 반응들 사이에서 오는 긴장들로 특징지어지게 된다.

         그러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히치콕의 작품 중에 대단히 불편하게 하거나 복잡한 반응을 환기시키는 축에 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제시한 예는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이건 히치콕의 서스펜스 중에서도 최소한 만을 보여줄 뿐이다(최근 작품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제부터 할 비교는 우리를 더 깊은 단계로 안내할 것이다. 다시 한 번 히치콕의 작품과 명백한 관계가 있는 영화를 선택할 것이다. <싸이코>가 박스 오피스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몇 년 후에 만들어진 로버트 알드리치의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What Ever Happend to Baby Jane?)>이다. 알드리치의 영화에는 변호인이 있고, 지적으로 젠체하는 알드리치가 그 변호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교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다리를 저는 누이인 조안 크로폴드가 도움을 요청하고자 전화를 하기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애 쓸때, 그녀를 박해하며 그녀를 죽일지도 모르는 베티 데이비스가 시내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한칸 한칸 내려오는 절름발이 여성의 고통을 전달하려는 시도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엄청난 노력을 일단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다. 기실, 영화에서 거의 아무것도 효과가 없다고 해도, 그것은 시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분명 아니다. 매 사건은 사건이 짜낼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져있어서, 짜낼 것도 없는 젖통에서 더욱 짜내려는 알드리치의 확고한 태도를 알고서 자주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특정 서스펜스 시퀀스의 의도는 무엇일까? 무력한 여성에 대한  연민을 자아내려는 것일까? 그럴 의도로 이 만큼까지 길이를 늘리는 것은 완전히 불필요한 짓이다. 우리더러 그녀의 고통을 즐기라는 건가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서스펜스는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다. "그녀가 살까 죽을까?"라는 것을 넘어서서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함의(overtones)도 의의(resonances)도 없는 것이다. 자매들 간의 교차 편집은 이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베티 데이비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 측에서 행하는 부가적인 저항은 없고  그녀가 돌아오는 시점은 순전히 운이 좋은 것일 뿐이다. 어떤 경우든 영화는 <디아볼릭(Diabolique)>과 같이 트릭적인 결말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돌려버린다.

         먼저, 위의 장면을 <열차 위의 이방인>의 테니스 경기와 유죄로 덮어씌울 라이터를 사건현장에 심어두려는 살인마의 여정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차편집과 대조해보자. 여기에서 생성되는 긴장은 테니스 경합과 두 남자의 인내(시합에서의 승리, 배수구에 떨어진 라이터를 다시 줍는 것)로부터 만들어진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음에 생성되는 모든 반향(세심하게 짜여진 상징으로 가기 직전에서 멈추게 되는)은 어둠으로 내려 뻗어지는 손과 쨍한 볕 아래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 사이에서의 교차 편집에 의해 일깨워진다. 두 남자의 노력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관객들에게 가장 복잡한 반응이 환기되는 것이다. 혹은 알드리치의 시퀀스와 <이창>에서 그레이스 켈리가 살인범의 방안에서 수색을 하다가 깜짝 놀라는 장면을 대조해보자. 여기서 우리의 서스펜스는 그녀의 위험 상황에 책임을 져야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제임스 스튜어트의 서스펜스와 분리될 수 없다. 이 상황은 우리가 그녀를 거기에 보냈는데 이제 그녀가 우리 호기심의 대가를 치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서스펜스는 앞서 말한 히치콕적 도덕 특성을 갖는다. 여기서 서스펜스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캐릭터가 발전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자 그 발전이 가진 복잡한 의미의 내적인 부분이며, 우리는 그러한 서스펜스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더욱 더 많은 사례를 들어볼 수 있다. <너무 많이 안 사나이(The Man Who Knew Too Much>(1956년 판)의 유명한 알버트 홀 시퀀스를 보자. 여기서 서스펜스는 여주인공의 심리 속 고통스러운 갈등들이 외부로 투사된 것이다. 히치콕이 우리로 하여금 그 갈등을 공유하게 만드는 방식인 셈이다. 또한, <오명>의 종반부에서 계단을 하강하는 장면은 잉그리드 버그먼이 단순히 첩자들과 독살로부터 구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큰 의미에서 구조되는 것에 아울러, 우리가 클로드 래인의 캐릭터에 일종의 동정을 갖게 됨으로써 다소 복잡해지게 된다. 이 쯤이면 히치콕 영화에서 "서스펜스" 개념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 예를 든 것 같다.  앞서서 나는 그의 서스펜스가 그가 차용하는 주제 보다는 기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그렇게 얘기하면서 주제와 기법이라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고 얘기했다). 관객이 캐릭터들의 경험을 공유하게 하는 그의 기법이 때때로는 서스펜스이다. 때때로 서스펜스는 관객의 서로 상충되는 반응들에서 오는 긴장에서 야기된다. 때때로 서스펜스는, 추구할 법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욕망과 감정에 우리 스스로가 개입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가게 되면서 거세지는 불편함과 완전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서스펜스는 그를 통해 히치콕의 영화를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히치콕의 영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의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공유하거나 우리에게 전달되는 경험의 복잡한 도덕적 함의를 마음 속으로 항상 생각해야 한다.

         사실 내가 봤던 수많은 히치콕 모방작들 중에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히치콕적 서스펜스의 특질을 가진 딱 한 작품은 스탠리 도넨의 <샤레이드(Charade)>이다(리카르도 프레다의 <끔찍한 히치콕 박사(The Horrible Dr. Hitchcock)>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 그 자체로 대단한 개성을 갖춘 이 작품은 모방이라기 보다는 오마쥬다). 영화 종반부의 코메디 프랑세즈 외부 기둥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그 장면에서 오드리 헵번은 짧은 순간에 그녀의 신뢰를 원하는 두 남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서스펜스는 그녀 내부의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의 갈등이 투사된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지만 행동이 극단적으로 애매한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성적으로 행동해서 그녀가 지닌 보물을 다른 남자에게 건네야 하는가? 이 순간만 따로 떼어내어 본다면, 이 작품은 피상적으로나마 히치콕 영화의 모방작인 것이다.

         여기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다뤄본 주제는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히치콕의 할리우드 초기작품인 <의혹(Suspicious)>에서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게나마 다뤄졌던 주제이다. 이제 이 주제를 다루어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히치콕의 후기작을 관통하는 두 요소를 풀어낼 수 있는 편리한 초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두 요소 자체가 그의 후기작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에 접근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의혹>의 탄생을 둘러싼 미스터리, 그러니까 히치콕이 마지막 순간에 엔딩을 바꾸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그리고 만약 바꾸었다면 그것이 그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미스터리는 무관하다는 점을 밝혀두는 편이 낫겠다. 오로지 완성된 작품만을 두고 생각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의 결정이 어땠느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대부분이 약간 "덜 익은" 성질을 띈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는 현 상태의 엔딩,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현 상태의 엔딩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히치콕이 엔딩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하는 말은 쉽사리 믿기가 힘들다.

         첫째는 내가 치유적 주제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에 따르자면 등장인물들은 탐닉을 하거나 그 결과와 함께 살아감으로써 약점이나 강박으로부터 치유된다. 조안 폰타인은 캐리 그랜트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곧 이어 그는 거짓말쟁이로 밝혀지고 그녀는 그가 살인자라고 의심한다. 결국 그녀를 죽일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의혹이 결혼생활에 해독을 끼치고 그들 사이에 어떠한 열려진 소통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최후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열게되어서야 오해가 밝혀지고, 영화의 가장 마지막 쇼트에서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다. 두 개의 쇼트는 따로 다루어 볼 만하다. 첫 번째 쇼트는 의혹을 구체화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부부는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와 단어 게임을 한다. 두 남자는 이야기를 하고, 여자의 손은 탁자 위에 놓인 문자를 만지더니 부지중에 그들을 배열하는데, 어느순간 "살인"이라는 단어가 형성된다.[3] 곧 이어 그녀는 남편이 그 친구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 의식이 무의식에 의해 인도될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는, 깊숙한 곳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가치관(values)이 의식적인 사고를 조종할 수 있음을 훌륭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처음에 조안 폰타인은 꾸밀줄도 모르고 성적으로 억눌려있는 젊은 여자였다. 장군[2]의 딸인 그녀는 엄격하게 체통을 따지며 바깥 세상의 일이라곤 전혀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같은 삶을 살아왔다. 따라서 화려하고 무모하며 근심걱정없이 자유분방한 남자에게 하릴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가족적 배경과 가정교육이 지향해왔던 모든 가치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대변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그가 살인자가 되기를 바란다.

         두 번째 쇼트는 영화의 나중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데, 롱 쇼트인 이 쇼트에서 조안 폰타인은 자신의 의혹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며 검은 드레스를 입고서 창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문의 틀은  거미줄과 같은 그림자를 그녀 주위에 두른다. 그녀는 스스로 피해자라고 느끼고 있다. 덫에 걸린 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갑자기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준다. 그녀는 사실은 거미이다.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거미줄의 중심에서, 그녀의 의혹 위에서 스스로 살찌우는 거미인 것이다. 혹은 그녀는 거미인 동시에 파리이다. 자신이 친 덫에 걸린 피해자. 이 이미지는 <싸이코>에서의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를 예기한다. 박제된 맹금류 아래에 앉아 있는 노먼 베이츠는 (새와 유사성으로 인해) 새가 되는 동시에 (박제상 아래 놓인 그의 위치로 인해) 그것의 희생양이 된다.

         두 번째 요소는 이러한 "치유"를 관객이 동일시하게 함으로써 관객에게 확장하는 것이다. 조안 폰타인 캐릭터의 외양은 매우 평범하다. 꼭 장군의 딸로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결혼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우리는 단일한 의식으로 제한된다. 우리는 그녀가 아는 것만을 알고, 그녀가 보는 것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의혹을 공유하고 그녀와 함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우리는 캐리 그랜트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는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근사하다. 세속적인 근심걱정과 속박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우리는 점차적으로 그의 과()함에 당황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돈을 무모하게 써버린다든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돌보는 것을 무모하게 유기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매우 불쾌하게 보이게 된다. 그래서 그를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가 완벽하게 불한당이라면, 이제, 우리는 면죄부를 갖게 된다. 기만당한 피해자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복수하는 셈이 된다. 조안 폰타인의 손가락이 문자들을 배열해서 "살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때, 카메라는 우리를 그녀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그 손은 우리의 손이다. 영화는 남자의 삶에 대한 태도와 여자의 태도를 차별하지 않는다. 감정표현은 꺼리고 근심걱정은 없는 그녀의 고상함(respectability)이 가진 한계가 혹독하게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에 대한 불가피한 보상-완전한 무책임함(irrespectability)에 끌리는 것-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충동은 등장인물들만의 충동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충동도 수반된다.[4]

 


         이 서문에서 이후에 다룰 일곱 작품의 분석을 위한 대강의 초석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3] 히치콕의 최근 작품 중 세부적으로 다룰 다섯 편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심하게 숙고한 후에 선별하였다. 첫째, 이 다섯 편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놀랍고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걸작의 사슬을 형성하며 그의 예술 세계의 정점을 보여준다. 둘째, 이 작품들은 폭 넓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셋째, 앞으로 이 작품들은 다시 상영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점 때문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나의 분석을 작품을 다시 보는 시금석으로 제안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들은 이 나라에서 비평적인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마지막 이유는 선별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독자의 관심을 [무비]의 최근 호에 실린 히치콕에 대한 글들로 이끄는데 가치가 있다. <밧줄(Rope)>에 대한 V.F.퍼킨의 글([무비 7])과 이안 카메론의 <너무 많이 안 사나이(The Man Who knew Too Much)>에 대한 2부작 분석([무비 3] [무비 6])이 특히 그것이다. 내가 <열차 위의 이방인> <밧줄>에 대한 분석을 추가 하기로 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작품들의 내적인 장점과 히치콕 전체 작품과 관련하여 가진 중요성 때문이고, 부분적으로 그 영화들이 빈번히 재상영된 탓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화에 대한 논의에 앞서, 다른 몇몇 영화들을 대강이나 훑어보겠다. 완벽한 조사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불가능하게 된 것들이 있다.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 <염소좌 아래에서>와 같은 핵심 영화들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가능함을 인지하면서, 나는 그냥 변덕을 따랐다. 때문에 독자들이 나의 작품 선별이나 어떤 주어진 영화에 할당된 분량과 특별한 의미를 연관짓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작품 선별이나 다루는 분량이 나의 평가와 꼭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언젠가는 히치콕의 영국시절 작품들을 재발견하고 정당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영국시절 작품들은 그의 최근 발전에 너무나 가려져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습작 보다 약간 더 나은 것, 히치콕의 작품이니까 흥미로운 것처럼 보인다([베로나의 두 신사(Two Gentlemen of Verona)]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기에 흥미로운 것처럼). 물론, 영국시절 이후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소재나 기법들의 윤곽을 영국시절의 작품들 속에서 발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장미 꽃이 활짝 폈는데 잎눈을 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영국시절 작품들이 후기 할리우드 작품들보다 낫다거나, 그만큼 좋다거나 혹은 비교할만하다는 생각은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 <사라진 여인(The Lady Vanishes)>과 같은 유쾌한 소()희극 스릴러의 경우 히치콕 특유의 톤을, 긴장과 약간의 유머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그 톤을 원초적인 상태로 보여준다. <부자와 이방인(Rich and Strange)>의 경우, 실험작의 특성이라 할만한 서툴고 불확실한 만듦새에도 그의 특징적인 결혼-결합(marriae union)에 대한 몰두를 보여준다. 랄프 토마스가 <39계단(The 39 Steps)>을 리메이크하며 뻔뻔스럽게 표절한데다가 서스펜스를 형편없이 다루고 싸구려 외설 농담이나 했기에, 히치콕 원작의 기술적 수완이나 도덕적 순수함이 더욱 돋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더 주제적인 응집력을 갖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경우, 이 작품과 표면적으로 유사한 초기 작품들의 특성은 제한되어 있다. 초기 작품들에는 신선함과 자연스러움이 있고, 훨씬 더 섬세하게 조직된 후기작들은 이러한 지점을 결여하고 있다. 그렇지만 후기작들에는 창의적인 강렬함이 가득하며 이 점은 영국 시절의 작품을 선호하게 한다. 비유컨대 [맥베스]보다 [실수연발(The Comedy of Errors)]을 선호하는 것과 같다.[5]

         할리우드 시절의 작품들 중, 혹자는 셀즈닉을 위해 만들었던 세 작품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순이자 만족도 순으로 언급하자면 <레베카(Rebecca)>, <망각의 여로(Spellbond)>, <패러다인 부인의 재판(The Paradine Case)>이다. <레베카>(1940)는 히치콕의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제작비는 엄청 들었지만, 히치콕이 각본에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찌됐건 이 영화는 다프네 뒤 모리에 소설의 소화하기 힘든 소설적 요소를 제대로 소화하지도 토해내지도 못했다. 올리비에의 매력없는 연기는 문제를 만들어 그런 무례한 인간에게 집착하는 여주인공에게 갖는 우리의 동정심을 파괴한다. 그럼에도 보상은 있다. 첫째, 올리비에와 조안 폰타인이 신혼 여행가서 찍은 영화를 보면서 비참하게 말다툼을 하는 빼어난 장면. 이 장면에서 우리도 그들과 함께 그들의 과거 행복과 현재의 비참함을 보게 된다. 산산조각난 결혼생활의 두 국면을 보게되는 것이다(비록 어떻게 조종하는 이 없는 고정된 카메라가 트랙킹 쇼트를 찍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6] 둘째, <염소좌 아래에서>를 예기하는 "고해" 장면.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장면들은 죠지 샌더스를 중심으로 한 장면들인데, 이는 히치콕의 특징이라 할 만한 반응 상의 복잡성, 우리로 하여금 매혹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끼게는 하는 반응 상의 복잡성을 자아낸다. [7]

         <레베카>가 더욱 흥미로운 이유가 <염소좌 아래에서>를 위한 밑그림을 제공했기 때문이라면, <망각의 여로>(1945)는 외상성 쇼크를 다루는 사례사를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면에서 <마니>를 위한 피상적인 밑그림에 해당한다고 할 수있다(물론 <레베카> 보다야 그 자체로도 훨씬 흥미진진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재 상의 분열이다. 잉그리드 버그먼과 그레고리 펙이 서로 신뢰하고, 마음의 벽과 금기들을 제거하며 관계가 발전 됨에 따라 주된 긴장이 조성된다. 마지막에 살인자를 확인하는 부분은 어거지이고 흥미롭지도 않다. 관객-자살 쇼트에서 진홍색 섬광이 번쩍이는 장면은(카메라는 살인자의 위치에 놓이고, 총을 쥔 손이 버그먼을 따라 문으로 향한다. 그러더니 총이 우리를 보고는 빵! 우리 모두 죽는 것이다), 히치콕이 동일시 테크닉을 무의미하게 사용한 아주 드문 사례 중 하나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잉그리드 버그먼을 쏠 생각이 없고 살인자와 일말의 연결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예술가가 테크닉 자체를 위하여 테크닉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 장면에서 히치콕은 그의 소재에 그다지 몰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꿈 시퀀스가 히치콕 영화의 일부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8]

         아마 <망각의 여로>가 세 편의 셀즈닉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영화일 것이다(<패러다인 부인의 재판>은 훨씬 덜 흥미롭지만 더 만족감을 준다). 이 영화는 <현기증>을 가리킨다. 그레고리 펙이 알리다 발리에게 매혹당하는 것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킴 노박에게 매혹당하는 것의 전조가 된다. 두 매혹은 똑같은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후자에 담긴 탁월한 보편적인 의미가 이 영화에는 거의 담겨있지 않다. 본질적으로 훨씬 상투적인 관념만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히치콕의 의지와 상반되게 루이 주르당을 잘못 캐스팅함으로써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법정의 대단원은 복잡하고 성숙한 도덕 관념을 거장답게 표현했다. 우리는 발리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을 멈출 수가 없고 우리가(따라서 펙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는 장면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구명선(LifeBoat)>(1943)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영화였다. 어린시절의 기억이 영화를 단순화해서는 다소 거친 반-나찌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구명선의 생존자들이 독일인을 구하는데, 그가 점점 사악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밝혀지자 때려죽이고 히치콕과 영화가 흔들림없이 그들 뒤를 바쳐주는 그런 영화로 말이다. 물론 실상은 이와 한참 다르다. 월터 슬레작이 연기하는 나찌당원은 결코 상투적인 악당이 아니다. 그는 히치콕의 다른 작품들의 매력적인 악한들과 밀접한 유사성을 가졌다. 그가 분명히 가진 매력, 사람을 꾀는 매력은 깊숙이 내재된 그의 행동 원칙을 우리가 평결하는 데 전혀 중화점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매력은 우리의 마음에 그가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게, 그의 잠재적인 인간적인 우수성을 느끼게 해준다. 반면에 다른 캐릭터들은, 심지어 선하고 친절한 라디오 기사와 간호사마저 그에게 돌아서서 그를 죽일 때에 숨겨졌던 야만성을 드러낸다. 이는 명백히 우리를 자극한다. 나찌당원이 자신이 일찍이 다리를 절단했던 선원을 죽였다. 그러나 히치콕의 장면 연출은 그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에 어떤 의심도 남기지 않는다. 살인은 대단히 지저분하고 통제되지 않는 폭력에 의해 행해졌다. 그래서 (특히) 간호사마저 동참할 때 우리는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4] 집단 폭력이자 사형(私刑)과 다를 바 없는 것을 유일하게 제지하는 흑인 캐릭터가 저항 할 때 그 반응은 굳어진다.   이 장면은 극도로 불편하다. 우리가 공격자들의 분노를 충분히 공유하고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그 살인에 연루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공격하는 자들의 일차적인 동기가 그들을 속인 사람에 대한 복수의 열망에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절망감과 낙천성을 함께 배치하는 전형적인 히치콕의 대위법을 살펴볼 수 있다. 1943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로서는 굉장히 놀랍게도, 절망감은 나찌당원이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그의 힘은 나찌의 교리에서 나온다는 데 기인한다. 다시말해,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힘, 그러니까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 힘으로부터 절망감이 생긴다. 그리고 그 힘이 좋은 목표에 봉사할 수도 있다. 선원(윌리엄 벤딕스)인 조는 시민 사회에서 외과의였던 나찌 당원이 다리를 절단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괴사하는 다리 때문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그이 없이는 수술을 수행할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원초적인 질감 때문에 견딜 수 없이 끔찍함을 느끼게된다. , 불 위에서 멸균 중인 잭나이프가 보이고 나찌 당원이 일말의 흔들림없이 이를 행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오싹함을 느낀다. 우리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존경심을 철회하기가 힘들게 된다. 존경할 만한 것과 혐오할 만한 것이 같은 근원에서 파생되었기에 구분하기가 힘든 것이다. 나찌 당원에게는 타당한 구석이 너무도 많기에 위험하다(다른 많은 영화에서 나찌는 그런 식으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를 제외하고는, 도덕적으로 순수한 인물들은 무능력하다. 그리고 "영웅"의 존재에 가장 버금가는 인물인 맑시스트 스토커(존 호디악 )가 외관상 나찌 당원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찌와 비슷하게 무자비한 결정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따뜻한 인간적 동정심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약해진다. <구명선> <밧줄>에서 히치콕이 헌신적인 반() 파시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 편으로 그가 헌신적인 민주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명민한 독자라면 벌써 <마니>의 마크 루트랜드를 떠올릴 지도 모른다. 비록 히치콕이 마크의 행동을 정치적인 언어로 변형하는 것을 아마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짚어야겠지만서도 말이다(본능적이고-동정적인 흐름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릴 때만이 유효할 것이다).

         이러한 함축적인 절망감의 단서가 되는 낙천성은 경험-치유 주제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탈룰라 뱅크헤드의 캐릭터는 영화 내내 그녀의 고정된 이미지에 매우 정확하고, 복잡한 태도를 훌륭하게 표현한다. 동의하는 부분도 부정하는 부분도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녀 자신과 삶 사이에 만들어 놓은 인공적인 장벽을 진실한 여성이 출현하게 될 때까지 점차적으로 벗어던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 그녀의 냉소적인 터프함 속에 보였던 것은, 일부는 가식이고 일부는 진정한 힘의 표현이었다. 그녀가 값 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물고기 잡는 데 쓰고 나서 잃어버렸을 때 마지막 단계가 달성된다(그녀는 그 목걸이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었다. 때문에 그것은 상징적 중요성을 획득한다. 트로피로서,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거짓된 가치의 구현체로서). 그녀의 통제될 수 없는 웃음을 우리는 히스테리라기 보다는 해방감의 표현으로서 느끼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외적 치장물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구명선>은 기법 면에서는 주류 히치콕의 영화는 아닐 지도 모른다. 영화 내내 관객은 행위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게끔 자유롭게 놓여져있다. 초연한 시점인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뚜렷한 중심 인물이 없다. 그러나 주제를 강조하는 면이나 복잡한 도덕적 입장을 놓고 보자면 이 작품은 충분히 주류 히치콕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명>(1946)은 대단히 풍부한 작품이라 그것의 중요성을 두 세 문장으로 평가하기가 꺼려진다. 나는 그랜트-버그먼의 관계가 발전 되게하는 감수성과 통찰, 서로를 파괴하는 관계의 국면으로부터 서로 치유하는 국면으로의 헤쳐나감, 두 번째 애정 관계인 세바스챤(클로드 레인)과 그의 엄마(마담 콘스탄틴)의 관계를 병치시킴으로써 발생되는 반응의 복잡성, 관객들의 이입과 관심이 계속해서 수정됨으로써 성취되는 여러 미묘한 정서적 효과를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이 작품은 그 시점까지의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완성된 작품이다. 관계의 진전은 두 애정 씬으로 요약된다. 기저에 깔린 불완성에서도 불구하고 발코니에서 연인들이 키스하는 초반부의 장면으로부터, 속마음과 달리 그녀가 뛰어들도록 한 - 심지어 부추긴 - 상황으로부터 그랜트가 버그먼을 구하러 왔을 때의 확실하고, 염려하며, 보호력있는 부드러운 포옹으로의 진전.[10]

         히치콕에게 키스는, 누구가는 부차적인 것으로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종종 관계 전체를 대변하며 (만약 어떤 작품이 명백히 키스의 덕을 본다면) 작품 전체의 느낌을 대변한다. 방금 말한 사례 외에,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남편과 아내, 아내와 연인의 관계를 대조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키스에서 키스로 장면 전환을 해내었음을 생각해보라. <열차 위의 이방인>에서 파를리 그래인져와 루스 로먼은 실제로는 친밀하다는 느낌이 거의 없는 뻣뻣한 포옹을 했었다. <이창>에서 그래이스 켈리는 자신 만의 집착에 빠져 반응이 없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현기증>에서 360도로 카메라가 따라갔던 오래 지속되고 농밀했던 키스는 대번에 환상이 맞았고 의심은 늘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캐리 크랜트는 손으로 에바 마리 새인트의 머리를 감싸면서 키스를 했다. 마치 머리를 으깨려는 것처럼. <>의 어느 부엌에서 있었던 어색하고, 확신없는 포옹. <마니>의 키스 장면에서 동정심을 갖게하는 질감들. 남자의 마초적이고 보호력있는 부드러움이 클로즈업으로 드러난 여자의 무반응한 얼음장같은 얼굴을 관통하려고 한다.

         <밧줄>(1948)은 맨 첫 쇼트를 제외하고는, 시간적인 연속성뿐만 아니라 관심(regard)의 연속성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한 아파트 안에서 내내 진행되며 십분짜리 테이크들로 끝까지 채워져 있다. 혹자들은 이 영화는 그저 연극을 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퉁명스럽게 얘기한다. 그러나 <밧줄>은 가장 영화적인(cinematic)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데, 영화 매체의 제한하는 특징들 중 하나 즉, 카메라를 관객의 눈으로 사용함으로써 관객을 행위의 바로 앞으로 데리고 가서 카메라가 그렇듯 관객에게 다른 이의 내부를 보여주는 능력을 궁극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대 위로 올라가 배우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제스쳐와 움직임, 반응을 면밀히 따져볼 수 있다고 해서, 정확한 유추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밧줄>에서 카메라가 관객의 눈이 되었다고 이야기할 때 그 눈은 히치콕이 보도록 원하는 것만을, 히치콕이 보기를 원하는 에 본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카메라는 어떤 행위나 제스쳐, 짧은 시선을 연속적인 움직임 내에 있는 다른 것들과 연관 짓는데 사용되면서 대단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관객들의 눈이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세부사항을 지속적으로 보게 한다. 십분짜리 테이크는 히치콕의 서스펜스 기법을 명확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기법의 난이도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 작품은 탁월하다. 배우들도 몇몇 출연하는데다 동선도 어지러운 복잡한 사건을 타이밍까지 맞춰가며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기법은 서스펜스 그 자체이며, 다른 모든 작품에서 히치콕이 정말 몰두했다고 여겨지는 도덕적 목적(purpose)의 구현체이다. 만약 "목적"이란 말이 너무나 밋밋해 보인다면( cut-and-dried), "메세지를 가진 작품"이라 말해도 좋고, 히치콕의 복잡한 도덕관(moral sense)을 전달하는 매체(vehicle)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밧줄>의 주요 전개 가닥은 살인 사건이 밝혀지는 점진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캐릭터인 루퍼트가 자신이 얼마나 그 살인 사건에 얽혀있는지를 깨닫는 과정이다. 사실 저 두 과정은 일치하며 서스펜스의 성질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전개의 양면성에 달려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러한 서스펜스에 처음부터 붙잡히게 되는데, 우리의 현명한 판단력에 반하여 용서할 수 없는 두 젊은 살인범들이 도망가기를 원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얽혀들게 되는 것이다. <밧줄>의 서스펜스는 이러한 점과 그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모순된 욕망 사이의 긴장에 근본적으로 놓여있다. 반 파시스트 영화 혹은 어느것에든 반()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직설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관객들을 옳은 편에 존재한다는 편안한 느낌과 함께 더욱더 안주하게 하며 집으로 돌려보내는 영화가 있다. 이와는 다르게 히치콕의 방법이 있는데, 이는 사악한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미묘하게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뿌리내린 잠재성이 있고, 우리는 부단히 그것이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나는 <밧줄>(혹은 파시즘보다 훨씬 멀리 논의가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구명선>, <이창>)과 같은 작품이, 작품의 주제와 태도를 단순한 흑백론에 입각하여 커크 더글라스의 입을 통하여 나쁜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말하여 (처형 장면의 불편한 힘에도 불구하고) 손쉬운 만족을 주는 큐브릭의 <영광의 길(Paths of Glory)>같은 작품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의 TV 프로그램이나 트레일러, 그가 홍보하거나 용인하는 광고들을 보건대, 어떻게 보면 비타협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히치콕은 한 가지 근본적인 예술적 본질에 있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절대로 명확한 진술을 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의미"는 구체적인 실현을 통해, 전적으로 극화에 입각하여 전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명민함과는 거리가 먼 관객이라도 <밧줄>을 보고나면 불편함을 느끼면서 떠나게 될 것이다. 작품의 긴장이 절대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창문이 열릴 때 이루 말하지 못할 해방감이 느껴지고, 총알이 발사된다. 프로프간다와 달리 예술은 그것의 본질인 불분명한 성질로 인해 (사태를) 전혀 모르는 관객(혹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작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밧줄>같은 작품은 관객이 가져갈 어떤 "메세지"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최초에 은근하게 발생했다가 이후에  (극적으로, 명백하지는 않게) 비판당한 그러한 감정들을 의식의 표면으로 데리고 가고야 만다. 여기에는 아주 기본적인 예술적인 원칙이 있다. 적용의 범위(range of application)를 명확히 해야한다는 원칙이다. 제인 오스틴이 [엠마(Emma)]에서 써먹었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품 전체에 널리 퍼진 도덕적 톤과 기법을 대변하는 한 가지 사소한 지점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루퍼트와 그의 예전 제자인 브랜든(존 달) "초인"이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는 등 용인된 도덕을 뛰어넘어 그 스스로를 위치시킬 권리가 있는 가에 관한 기발한 대화를 나눈다. 최소한 루퍼트의 입장에서, 이 모든 이야기는 농담 따먹기라 그의 태도는 편안하며 매혹적이다. 때문에 그의 매력과 그의 유머의 과격성-자유와 무책임성-에 우리는 반응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운 반응 아래에서, 인생관으로 채택된 이러한 철학이 어떠한 결과를 야기했는가를 우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카메라는 루퍼트와 브랜든으로부터 트랙 어웨이 해서는 오른쪽으로 트는데 그곳에는 켄틀린(세드릭 하드윅 分)이 점차 커지는 불안감 속에 앉아 있으며, 카메라가 그를 잡자마자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본다. 우리는 그가 그의 사랑하는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아들이 오나 안오나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들은 살해되어 시체가 된 채 방 한 가운데의 상자에 놓여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얼굴 위의 미소는 얼어붙게 된다. 효과는 배우의 연기 뿐만이 아니라(물론 우수하다)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달성된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아버지의 움직임과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연관지으며 동시에 전체 상황 속에서 그의 움직임을 강화시킨다. 만약 거기서 컷을 한다면 그 지점이 너무도 명백해져 버리고, 시선의 연속성을 잃게되면서 정서적 효과는 누그러뜨려져 버릴 것이다. 카메라 움직임 때문에 우리는 양립 불가능한 두 태도에 동시에 반응을 하게 되고, 두 태도의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평가하게 한다(의식적 차원에서든 아니든).

         <밧줄>에는 두 가지 취약점이 있다. 히치콕은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결심을 끌고나가 십분 짜리 테이크 사이 사이에 피할 수 없는 휴지(休止)를 어두운 물체에 트랙킹을 했다가 다시 그곳으로부터 트랙킹 해 나오는 방법으로 감추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루퍼트가 상자의 뚜껑을 냅다 열어 제낌으로써 화면을 까맣게 만드는 때의 효과는 전율이 인다. 그러나 등장 인물의 등으로 가거나 등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무런 극적 효과를 수반하지 않을 때가 수 차례 있다. 직접적인 컷을 했다면 훨씬 덜 산만했을 것이다. 두 번째 취약점은 관객들이 루퍼트가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기를 의도 했는가를 관객들은 원하고 또 내가 생각하키엔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11]

         <무대 공포증(Strage Fright)>(1959)에서 혹자는 창의적인 충동을 비교적 안 좋은 상황에서 느낄 것이다. 히치콕은 어느 순간 관객에 대한 제어력을 잃게 되고 절반쯤 지나면 우리가 무엇이 일어나게 될 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기 만족적 작품이라고 대단히 불만족스럽게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은 히치콕에게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흥미롭게 여길 것이다. 그의 발전과 연관있는 개념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오명>, <현기증> 그리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같은 서로 다른 영화의 공통된 주제가 여기서도 변주되는 것이다. 현상(Appearance)과 실제 간의 불일치(크레딧이 지나가고 안전 막(saftey curtain)이 열리면 무대가 아니라 실제 런던의 배경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의 질적인 동등함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내내 두 여배우 캐릭터들을 비교한다. "부패한" 스타인 샤를로트(마를렌 디트리히 ) "순수한" R.A.D.A의 학생 이브(제인 와이먼). 부패한 쪽이 전반적으로 순수한 쪽보다는 동정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전적으로 캐스팅 때문만은 아니다. 연기가 주요한 동기이다. 때문에 각각의 본성에 대한 계속해서 의심이 든다. 시작할 때부터, 이브가 그다지 조나단(리처드 토드)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프닝 시퀀스의 플래쉬 백에서는 살인이 발생하는데, 이 불쌍한 청년 호구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살인자로 몰릴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브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녀는 이 상황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상황 때문에 그녀는 낭만적인 여주인공인 샤를로트처럼 그녀 자신의 삶을 극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기실 샤를로트는 조나단에게 함정을 판 장본인이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르면(그녀의 과격한 냉담함과 냉소적인 태도가 잠시 벗겨지는), 비록 그에게 감정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더라도, 그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며 이브 보다도 더욱 진실하게 동정한다. [12]  이브는 점차적으로 미남 형사(마이클 와일딩 )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택시 안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지게 된다(비록 제인 와이먼이 끔찍하게도 과장해서 연기하지만). 이 장면은 조나단을 돕기 위해 의식적이고 계산된 유혹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연기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현실과 결합되면서 어느 누구도 확실히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모르는 것은 이브이고. 그녀는 샤를로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가 여자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겠어요? - 나는 몰라요."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조나단 그야말로 중심인물이다. 매혹적일 확률이 농후한 히치콕적 세계의 체험 대상이다. 과거회상 시퀀스(여기에서 그는 이브에게 샤를로트가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고 어떻게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지를 말한다)는 우리로 하여금 곤경에 처한 조나단과 우리를 동일시하게끔 조작되었다(부분적으로는 주관적인 카메라 기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는 우리는 불가피하게 모든 것을 내레이터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만을 안다는 점 때문에). 때문에 조나단의 운명은 우리의 운명이 된다. 우리는 일종의 안심을 하고 영화를 본다. 어떻게든 이 호감가는 젊은이가 헤쳐 나갈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운명이 함께 하는 여자의 진정성을 계속해서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우리는 편치않게 된다. 그러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면, 우리는 갑자기 샤를로트가 그를 함정에 빠뜨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진짜 살인자이다. 우리가 딛고 섰던 땅이 꺼져 버린다. 과거회상 장면은 고의적인 거짓이었다(로메르와 샤브롤이 뭐라 하든간에, 이미지 역시 말처럼 거짓말을 한다. 이는 논쟁할 거리도 못된다). 결과적으로 이브가 안전 막에 의해 간접적으로 그를 죽게할 때, 우리의 반응은 상당히 복잡해진다. , 우리는 여전히 조나단에게 충분히 연계되어 있기에 그녀의 행위를 배신으로 여기게 되고, 그의 죄와 죽음 모두에 참여하여 불편한 느낌에 싸인 채 남겨지게 된다. 가능한 모든 단순한 태도와 유리된 채.

         혹은 우리는 그러할 것으로 생각된다. <무대 공포증>이 응당 그러해야하듯 혹은 여러 지면에서 얘기되는 것처럼 걸작이라면 말이다. 영화 한 허리까지 뻗쳐있는 시나리오의 변죽은, 이상하게도 무기력한 미쟝센과 결합되어 우리의 집중력을 저해한다. , 조나단은 안 보인지 너무나 오래되어 동일시는 깨어진다. 각본은 너무나 상투적이라 이브가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조나단이 아마 결국을 살인범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는 볼 때 보다는 복기할 때 더 흥미로운 작품이다.

         샤브롤과 트뤼포가 히치콕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모든 작품 중에(이때는 <현기증>을 찍기 전이었다), <염소좌 아래에서> <나는 고백한다>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히치콕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 그것들은 너무 진지해요." 특유의 자학적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후자의 경우엔 동의할 수밖에 없다(시간 순으로 앞선 작품인 <염소좌 아래에서>에 대해선 논평할 수가 없다. 본 지가 너무도 오래됐다). <나는 고백한다>(1952)는 진지하고, 독창적이며, 매우 흥미롭지만 전반적으로는 실패작이다. 누군가는 이 작품이 히치콕이 명백한 기독교 옹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라고 생각하곤 했을 것이다. 누군가 이 작품에서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반응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그는 허투로 본 것이다. 교회 건축물의 "인상적인" 사용은 신부(神父)의 딜레마에 대한 어떤 효과적인 구체화, 고민 끝에 내 놓은 외적 대체품이다. 종교와 고해법(告解法)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들이 주는 느낌에 대한 대체품인 것이다. 그의 신부직(vocation)은 데이터에서 요인이 차지하는 바에 불과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그가 하이 앵글 롱 쇼트로 잡힌 채 길을 따라 걷고, 스크린의 전경에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 상이 걸린 장면이 나오는 순간은 히치콕의 전작(全作)을 통 틀어 "젠체하다"라고 하는 말이 머릿 속에 떠오르는 정말 몇 안되는 순간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직전 작품인 <열차 위의 이방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처음으로 전작이 더 낫다. <나는 고백한다>에서의 신부직과 로건 신부 사이의 관계는 정계에 대한 가이 해인스의 관계와 같다. 질서의 세계로서 무질서한 과거로부터 적법한 탈출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에는 다음과 같은 미덕이 있다. (a) 플롯 상에서 대단히 중요할지라도, 정계가 영화의 중심은 아니다. 가이의 소명 의식(vocation)으로 히치콕이 자세히 파고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현재 그런 것처럼). 반면에 <나는 고백한다>의 경우 가톨릭 교회 법의 한 지점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자신의 신념에 헌신한다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얘기다. (b) <이방인>에서 히치콕은 가이의 소명 의식이 얄팍한 기회주의에 의해 때묻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수상쩍다는 점을 내키지 않고 암시한다. 그러나 <나는 고백한다>는 로건의 헌신성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하면서, 히치콕은 이에 대해 어떠한 비판을 할 또, 극적인 견지에서 로건의 실제 태도를 분명히 보여 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c) 살인자 켈러의 개괄적인 모습은 비록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이방인>의 브루노 앤써니 보다 훨씬 상투적이고, 성기며, 암시적이고 복잡하다. (d) 죄의 상호교환이라는 유명한 주제는, 즉 플롯 상의 수준 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의 주인공과 살인자가 연관되어이 있다는 주제는, <이방인>에서도 전적으로 만족스럽게 처리 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고백한다>에서는 훨씬 더 유기되어있다(설사 거기에 그 주제가 있다고 얘기할 수나 있을 때의 문제겠지만). (e) <이방인>의 세계에서 히치콕은 편안해 보이지만, <나는 고백한다>에서는 지속적으로 속박 당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전작은 긴장의 팽배함과 유창함이 놀라울 만큼 잘 조합되어 있는데 반해, 후작은 되다는 인상을 준다. 속박감은 확실히 주제나 잘못된 구성 때문은 아니고, 배경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친숙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기 보다는 질질 끌어서 생긴 문제로, 히치콕이 어린시절 예수회 전통에서 양육된 것이 불완전하게 흡수되어 영향을 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경우든, <나는 고백한다>는 작품과의 관계 면에서 헨리 제임스가 [카사마시아 공주]와 맺는 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히치콕이 회고하며 반감을 표현했던 다소 거슬리는 "진지함"의 대가는 톤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복합성을 상당히 희생한 대가인데, 여기서의 "진지함"은 거의 대부분 아이러니와 유머 간의 상호작용을 배제시켜 버린다. 속박감은 대개 몇몇 조그마한 터치 상의 불확실성에 있다고 특징할 수 있는데, 이는 연출자가 전체 상황에 제대로 반응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살인자의 부인이 죽으면서 로건에게 용서를 구할 때, 그가 사실상 그녀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그의 인간성의 결핍에 대한 어떤 비판이 함의된 것 같지는 않고, 히치콕이 정말로 이 장면의 함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앤 박스터가 결국에 사랑했던 남편에게 관심도 흥미도 보이지 않으며 그를 극단적 위기에 처하게 하고 져버리는 모습은 매우 이상하며 목적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고백한다>에서 그 자체로나 <>의 애니 헤이워스를 예기하는 것으로서나 가장 흥미롭고 성공적인 부분은 앤 박스터가 맡은 인물이다. 보트 위에서 그녀가 로건에게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시인하는 장면은 켈러와 연관된 다른 어떤 장면 보다도 긴장감 있다. 그녀가 나오는 모든 장면에서 낭만적 환상에 대한 자기-탐닉적 집착으로 인해 의지적으로 삶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낌을 받게 되는 데, 이에는 풀기 힘든 도덕적 과제가 수반된다(혹자는 여기에서 애니 해이워스 뿐만 아니라 <현기증>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 그녀의 성격을 묘사하고 그녀 삶의 자질에 대해 중요한 도덕적 판단을 환기시키기 위해 주관적인 플래시백(그녀가 고해하는 장면 중)을 특출나게 사용했던 것을 따로 지적해볼 수 있다. 이 과거회상 장면들은 순진하게 낭만적 분위기으로 극단적으로 양식화되어, 로건과 그녀의 관계 매 단계가 감상적 클리셰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녀는 과거를 보고, 이것이 그녀가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성취도 청개구리처럼 희생한 채 바라던 꿈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는 애인에게로, 감상적 연가의 조연에게로 계단을 내려가는, 이렇게 격렬한 낭만 소녀의 모습이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그녀 자신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 과거회상 장면들은 대개 거만하게 안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즉 순진한 것은 히치콕이라고  주장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산다. 그는 고상한 사람이 보기에도 종종 너무 섬세한 것이다. 플래시백에 담긴 시각적인 암시는 특별히 미묘한 톤이 있는데, 이는 연인들이 실제로 간통을 저질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후에 우리는, 로건의 명백히 진중한 증언을 통해 그들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고, 우리가 그동안 소원충족적이며 아름다운 묘사를 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무대 공포증>만이 거짓 과거회상을 가지고 있는 히치콕 작품은 아니다.

         확연히 종교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히치콕의 다른 작품은 <오인된 사나이>(1956)이다. 이 작품은 물론 <나는 고백한다> 보다 훨씬 성공적인 작품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나는 고백한다>의 인상을 재확인하는 것 같다. 작품 전반부는 히치콕이 만든 어떤 것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특히, 톤이나 제재에서도 너무나도 풍부한 <>와의 주제적 연관성을 지적할 수도 있다(기실, 두 작품은 어떤 점에서는 서로 대척점에 있다. 언급했던 순서대로 히치콕의 최근 작품들 중 가장 "사실주의적" -좁은 의미에서- 작품이고 가장 환상적인 작품인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들 수 있는 작은 질서라고 하는 것의 불안정성과 취약성이라고 하는 주제 말이다. 이미지들의 강화되면서, 헨리 폰다의 구속은 신원(identity)을 오해한 것 이상의 일이 된다.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들, 즉 개인적인 소유물들이 점차적으로 벗겨내지고, 처음에는 수동적이고, 상냥하며, 약간은 무능력하고, 어떠한 강한 정체성(identity)도 결핍되었던 한 남자가 자신이 협박당하던 그 방식으로 적의에 가득 찬 자로 변모하는 과정의 연출은 이러한 상황을 지하세계로의 추락으로 만든다. 실체의 표면 아래 놓인 혼돈의 세계로의 추락.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고, 가치가 존재하기를 멈추며, 모든 특이성은 통합된다. 발레스트레로에게 감옥은 지옥의 모습이 된다.

         작품 후반부는 이러한 강렬함을 유지해내지 못한다. 더욱 복잡한 반응을 자아내는게 아니라 발레스트레로의 부인(베라 마일스 )에게 관심의 초점을 이동함으로써 관객의 흥미는 사그라든다. 이러한 실패는 기본적인 구상 단계에서의 문제라기 보다는 구체적인 영화화 즉, 시나리오가 실제로 매장면 장면으로 옮겨지면서 망쳐지는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우리는 발레스트레로가 예비적인 교도소 생활을 끝마치고나서 파멸의 직전에 다가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미치는 것은 그의 부인이고 그를 구하는 것은 그녀의 광기이다. 그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을 제거해버리고, 부부의 정체성이 그것의 보존에 의지하고 있는 가족을 결속시키는 부담 전체를 그의 어깨 위에 얹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미지의 힘을 발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영화는 이러한 점을 기도를 통해 그가 삶을 발견한다는 것과 결합시킨다. 히치콕은 작품 후반부의 부분적 실패의 이유로 실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 그가 바라던 대로 시나리오를 계획하는 자유를 제한했다고 지적한다. 영화 내적 증거를 따져보면, 더 근본적인 원인은 마지막 부분에서 기적을 암시한다는 것의 불편함에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을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작품으로 간주한다면 발레스트레로의 모친이 그에게 기도를 해서 도움을 구하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작품의 핵심장면이라 할 수 있겠는데, 지면 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상당히 억지스럽고 상투적이다. 여기에는 믿음이라고 하는 아주 예민한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기독교적 작품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불만족스러움을 느꼈노라고 고백해야만 하겠다. 홉킨스의 시 "자연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이고 부활의 위안이다"와 같은 작품이 그 예다. 홉킨스가 "자연의 모닥불"을 다루는 솜씨는 시각적 생동성에 있어 참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에는 갑자기 시각성이 약해지더니,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다소 참신하지 않게 되다가 심지어 구태의연해지기까지 한다. 이와 비슷하게 히치콕 역시 <오인된 사나이> 초반부에서 질서의 불안정성을 탐색 할 때, 후반부에서 종교적 구원에 대한 관념을 다룰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작품의 흠결은 미지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입증 행위가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믿음 그 자체 보다는 믿고자 하는 열망인 것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히치콕은 자신의 형식을 다시 발견한다. 폰다가 진범을 굳건히 응시하며 정말 말 그대로 가라앉을 위기에 놓였던 정체성의 보존을 증명하는 장면에서, "옳음" "틀림"을 각각 대변하는 자들의 대립은 거대한 힘을 보인다. 정신 병원에 있는 부인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즉각적으로 <>의 세계로 인도한다. 히치콕의 영화 기저에 놓인 우주관과 히치콕의 기독교적 배경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간접적인 연관성만 갖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기독교에 대한 그의 헌신을 보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은, 피상적으로는 기독교를 그 무엇보다도 용인하는 듯한 바로 그 작품을 면밀하게 검토해보고 나면 손 쉽게 의심스러워 질 것이다.



***

본문에서 언급된 작품들(순서대로)

<마니(Marnie)>

<싸이코(Psycho)>

<이창(Rear Window)>

[맥베스(Macbeth)]

<리오 브라보(Rio Bravo)>

[겨울이야기(The Winter’s Tale]

<현기증(Vertigo)>

[사이트 앤드 사운드], "융단속의 무늬(The Figure in the Carpet)”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The Birds)>

<골드핑거(Goldfinger)>

<죽음의 가면(The Masque of the Red Death)>

[무비 6(Movie 6)]

<오인된 사나이(The Wrong Man)>

<열차 위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

<이창(Rear Window)>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히치콕의 세 열쇠((La Troisieme Clef d'Hitchcock)"

<염소좌 아래서(Under Capricorn>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판도스토(Pandosto)]

[심벨린(Cymbeline)]

<망각의 여로(Spellbound)>

<오명(Notorious)>

<나는 고백한다(I Confess)>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라미아(Lamia)”

<러시아에서 사랑을 담아(From Russia With Love)>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What Ever Happend to Baby Jane?)>

<디아볼릭(Diabolique)>

<너무 많이 안 사나이(The Man Who Knew Too Much)>(1956년 판)

<샤레이드(Charade)>

<끔찍한 히치콕 박사(The Horrible Dr. Hitchcock)> - 원문에서는 "The Terror of Dr. Hitchcock"

<찢겨진 커튼(Torn Curtain)>

<너무 많이 안 사나이(The Man Who Knew Too Much)>(1934년 판))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

[베로나의 두 신사(Two Gentlemen of Verona)]

<사라진 여인(The Lady Vanishes)>

<부자와 이방인(Rich and Strange)>

<39계단(The 39 Steps)>

<레베카(Rebecca)>

<망각의 여로(Spellbond)>

<패러다인 부인의 재판(The Paradine Case)>

<구명선(Lifeboat)>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영광의 길(Paths of Glory)> (스탠리 큐브릭)

[엠마(Emma)] (제인 오스틴)

<무대 공포증(Strage Fright)>

[카사마시마 공주(The Princess Casamassima)](헨리 제임스)

"자연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이고 부활의 위안이다(That Nature Is a Heraclitean Fire and of the Comfort of the Resurrection)"



[1] 괄호안의 주석 번호는 이전 판본의 미주와 코멘터리에 연관됩니다. 코멘터리는 1편 뒤의 개별된 단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 번역본으로 삼은 [Hitchcock's Films Revisited](2002, Columbia)는 2편으로 되어있는데, 1편은 "히치콕의 영화"이고 2편은 "히치콕의 영화를 다시만나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미주를 언제 번역할지는 모르겠습니다 - 옮긴이.

[2] 원문에서는 colonel이라 표기되어있지만, 이는 로빈 우드의 착각입니다. 이후의 나오는 모든 "장군"은 원문에서는 사실 "대령"이었으나 의미를 좇아 장군으로 표기함을 밝힙니다 - 옮긴이.

[3] <찢겨진 커튼(Torn Curtain)>을 다룬 장은 개정판에서 추가되었다. - 원주

[4] 실제 영화에서 린치가 가해지는 장면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사람은 간호사입니다 - 옮긴이.


Posted by 김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