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4. 6. 13. 01:54

*제목은 본인이 임의로 단 것입니다.

*원문: John Landis, <<Monsters in the Movies>> 중. 

*본문에 앞서 : "JL"은 인터뷰어 John Landis를, "DC"는 인터뷰이 David Cronenberg 를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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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의 대화(옮긴이:김탁구)


<폭력의 역사>(2005) 세트장에서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JL: 데이비드, 괴물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DC: 괴물이라는 것은 정상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은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비틀리게 되는 것이지요. 괴물과 같은 형상은 위협적이고 역겨운데,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여기는 울타리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괴물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 따라서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에 기형이 일어난 것이죠.


JL: 최초로 괴물 영화를 보았을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DC: <밤비>(제임스 앨거/새뮤얼 암스트롱, 1942))가 무서웠죠. <밤비>를 보면 인간이야말로 괴물이에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나 자신을 밤비와 동일시했지요. 당신의 엄마를 죽인 사냥꾼은 명백히 괴물일 수밖에 없는겁니다!


JL: 프랑켄슈타인, 드라큐라, 늑대인간과 같은 고전적인 괴물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들려주실까요?


DC: 모두 정상적인 인간성에 기형이 일어난 존재들이지요. 그것들은 괴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축에 속할 겁니다. 그렇지만 <죠스>(스티븐 스필버그, 1975)에 나오는 상어는 괴물이 아니에요. 당신을 죽이도록 고안된 동물일 뿐이죠. 얘한테는 감정이 없어요. 눈을 보면 죽은 눈이죠. 살인 기계라는 겁니다. 이것이 괴물의 조건에 부합할까요? 사실 그렇지 않지요. T-Rex도 마찬가지입니다.


JC: 고질라나 사이클롭스 혹은 드래곤은 어떤가요?


DC: 그 안에서도 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이클롭스는 인간의 형태에 기형이 온 것이지요. 어디보자, <해리 포터>에도 티라노사우르스 렉스에 기반한 대단한 괴 생명체들이 있어요. 제 생각에는 괴물의 형상이 인간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점점 더 자연 재해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가 상어한테 먹힌다면, 이건 거의 번개에 맞은 거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여기엔 어떤 사악한 의도가 없거든요. 정상인 것처럼 행동하는 동물같은 기계일 뿐입니다. 자연적인 사건일 뿐이지요. 


JL: <죠스>를 보면, 상어한테 인격을 부여합니다. 상어를 사악하게 만든단 말이에요.


DC: 맞는 말이에요... 상어를 신비화할 목적인 것이지요. 상어를 살인 기계 이상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죠스>가 사람을 잡아먹는 피라냐 수백마리가 나오는 영화보다 더욱 성공적이었을 겁니다. 상어가 한 마리라는 사실이 핵심이에요. 모비 딕과 같은 것이지요. 동물을 인간화하고 신비화한다는 면에서요. 사이클롭스의 경우에서처럼, 괴물을 인간으로 인지할 수가 있다면, 괴물, 괴물같은 그리고 괴물성이라는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가 특별해지면서도 울림이 있습니다. 


JL: 네. 프량켄슈타인이나 늑대인간 같은 괴물에 저는 항상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들은 피해자이니까요.


DC: 예. 이러한 캐릭터들에는 캐릭터들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층이 있습니다.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끝없이 뱀파이어 영화들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뱀파이어들이 더욱 더 인간적이게 될 수록, 그리고 <트와일라잇>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심지어 아름답게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장애인과 같은 어떤 무엇으로 여기게 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인간이고 어떤 질병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감정이입까지 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됩니다. 괴물이 정말로 위험한 괴물이라고 느껴지려면 어떤 위험하다는 느낌이 있어야만 합니다.    


JL: 최근들어 나타난 좀비에 대한 열광은 어떤가요? 살을 먹고, 죽은 채 걸어다니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요.


DC: 솔직히 비디오 게임과 관계된 것 같아요. 자꾸 말하지만 정상적인 인간들이 기형된 것입니다. 외관상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 열광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JL: 비디오 게임과 관련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신다면요?


DC: 비디오 게임의 초창기 시절에, 아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긴다는 부모들의 공포심을 떨쳐내기 위해서 실제로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죽이게 해야했습니다.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생명체라면, 죽여도 되게되는 겁니다. 좀비를 다루는 영화나 티비 시리즈를 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의 실질적인 부분들은 좀비를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죽이는 데서 오는 것이지요. 좀비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동정심을 자극하지 않아요. 모든 초점이 이를테면 "살육하는 재미"와 같은 것들에 맞추어집니다. 뱀파이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지요.


JL: 악마나 악령 혹은 사탄한테 빙의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DC: 악마니 악령이니 따위의 것과 관련해서는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들을 믿지를 않으니깐요. 그래서 제 작품 어느 것에서도 그런 주제를 다루지 않았지요.


JL: 영화는 불신의 유예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저는 무신론자 이지만 유대인이에요. 그리스도나 악마를 믿지는 않지만,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디킨, 1973)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무서워서 지리는 줄 알았어요.


DC: <엑소시스트>는 무서웠지요. 매우 효과적이었어요.


JL: 왜냐하면..


DC: 왜냐하면 관객들에게 진짜처럼 보이는 세계를 창조해냈고,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들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인물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관객들은 영화 속에 존재하고 싶어해요. 영화감독으로서 그러한 욕망을 이용할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셈이지요. 관객들이 그러한 점을 원해서 영화를 보러 왔는데, 당신이 영화에서 그들을 쫓아낸다면, 그렇다면 당신이 잘못한 것이지요. 만약 그들을 영화 속으로 끄집어올 수 있다면, 그렇다면, 맞아요, 전적으로 설득력있는 분위기(ambience)를 창조할 수 있다는 얘기이지요. 영화가 지속되는 시간동안 관객들은 그 세계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해요. <엑소시스트>는 완벽하게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고, 아주 서서히 당신을 끌어드립니다. 그러다가 당신의 머리를 쾅 하고 쳐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불신의 유예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표본이지요.


JL: 어쩌다가 <파리>(1986)에 끌리게 되셨나요? 이 작품은 미친 과학자를 정말 잘 보여주었습니다.


DC: 토론토 대학에서 유기 화학을 공부했어요.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과학자 겸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파리>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당대 최첨단이었던 자연 과학에 기반했다는 사실이 저에게 매력있어 보였어요. 마법이 아니지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딱 물리적이에요. 정확히 신체에 기반한 것이지요. 무신론자로서, 실존주의적 유대인으로서, 저는 신체야 말로 우리 자신이고, 종교는 그것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라고 생가합니다. 그러한 공포로부터...


JL: 당신 작품들 중 상당수가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 다루고있습니다...


DC: 맞아요.


JL: <파리>에서 제프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암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감독님 작품 상당수에서 암이나 노화를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아요...


DC: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점이 흥미롭지 않나요? 제 말은, 우리가 점점 늙어가면서 말이지요, 아마 당신에게 가까울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괴물같아 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된단 말이에요. 그들이 나이가 듦에 따라 그들의 신체가 변형된다는 의미에서 괴물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도 아마 불쾌한 쪽으로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이게 바로 괴물다움의 핵심이에요. 영화가 환상적이게 될 수록, 악마이니 하는 것들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지요, 영화들이 당신의 신체 그러니까 인간적인 실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JL: <엑소시스트>를 죠지 폴시 쥬니어와 짐 오루크라는 한 시절 복사를 한 적 있으나 지금은 신앙을 잃은 사람들과 보았어요. 저 역시 그 영화가 무서웠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는 잘 잤어요. 그런데 짐과 죠지는 몇 주동안이나 악몽을 꾸었지요!


DC: 그러나 <파리>에서는, 비록 우리가 과학자가 아니고 텔레포드를 타보지 않더라도, 인간이기에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을 보거나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되거나 너무 일찍 죽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게 됩니다. 어떤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든지 <파리>에서 제프 골드블룸이 맡았던 세스 브런들이라는 인물에게 일어난 일과 관계가 있을 수 있지요...


JL: 감독님께서는 제프 골드블룸을 미친 과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 거군요?


DC: 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미치지 않았어요. 과학자와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꽤 자세히 읽는 편입니다... 그들은 좀 이상한 종자들이에요. 그렇지만 그들은 정확히 인간적이에요. 전혀 미치지 않았지요.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인 겁니다.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영화감독들도 과학자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기술을 가지고서 이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고, 세계를 찾아내고 탐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과학 실험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JL: 영화 속의 미친 과학자들이나 미친 의사들은 대개 그릇된 신념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지"하는 식으로요. 우리는 신의 업적을 망치면 안되는 겁니다. 이러한 영화들은 매우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부분이 있어요. 비록 제가 감독님을 보수적이거나 수동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감독님 작품에 나오는 모든 과학자들도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되는 것 같아요.


DC: 음,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죠지 버나드 쇼가 말했지요. "갈등이야 말로 드라마의 본질이다." 극적 충동(dramtic compulsion)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영화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신 때문이 아닌 것이지요!


JL: 그렇지만 감독님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가 알아서는 안되는 것"에 연루되는 과학자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DC: 그렇지만 그것들은 그가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죠. 그건 꽤 다른 겁니다...


JL: 그렇지만 감독님 작품들에서 "그가 알아야만 하는 것들"은 폭력이니 죽음으로 끝맺음 됩니다.


DC: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흥미롭지 않을 테니깐요. 극적 충동이라는 게 그런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야 관객들이 흥미롭고 설득력있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JL: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DC: 네. 일종의 오만한 구석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 실존과 인류의 물질적 실존의 본질을 포착하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연관되는 지를 이해하려는 것도 또한 실질적인 욕망입니다. 저의 접근법은 윌리엄 버러우의 접근법과 유사해요. "예술은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창조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로 진화해나가면서 이 행성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비를 맞고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피할 곳을 찾습니다. 춥다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불을 피웁니다.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저에게는 그런 것이 인간 활동의 기본이에요. 이것을 극으로 옮기다보면, 무섭지만 흥미로운 맥락에서, 과학자들이 파국을 맞게되는 지점에서 끝내게 될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사실상 많은 과학자들이 파국으로 인생을 끝내게 되니깐요. 우주 왕복선 폭발로 운명을 달리한 우주비행사들처럼 말이에요. 과학자들은 그들이 탐사하는 사물들을 탐사하는 행위에 놓인 잠재적인 위험성에 대해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어마무시한 강박을 느끼는 거에요. 창조적인 강박이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지요. 제 영화들은 종종 그러한 일을 하는 데 치뤄야하는 비용에 대해 면밀히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고성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파리>(1986)의 스타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JL: 그렇군요, 데이비드! 그러나 당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런 이야기들은 경고성을 띄게 됩니다. 파국으로 끝나니깐요.


DC: 세계의 모든 의학적 발견에는 희생자가 따르는 법입니다. 연구자든 과학자든지간에요...


JL: 감독님의 <파리>에서 인상적인 것은 골드블룸의 캐릭터가 정말로 매력적이이면서도 웃기면서도 지적인 점이었어요. 


DC: 그들 스스로를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만듦으로써 특정 질병으로 고생하는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당신을 잠식한 이러한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거리두는 방법은 과학자처럼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는 것이지요. 당신 스스로를 당신 연구의 환자나 표본인것처럼 따져보는 겁니다. 


JL: 어째서 우리는 공포 영화(horror films)를 좋아하는 걸까요?


DC: 죽음에 대처해보는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JL: 그건 롤러코스터와 같은 거잖아요.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타면 느끼는...


DC: 아니요, 아니요, 그 말이 아니에요. 레이싱 카나 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한테 말한다고 칩시다. "내가 이제 죽는구나" 와 같은 요소가 물론 있습니다. 잘 설계된 롤러코스터라면 그런 느낌을 주겠지요. 속도와 중력에서 오는 놀랄만한 감각에 더하여 거기에는 자유로워진다는 감각도 있습니다. 아주 유쾌한 느낌이지요. 이것은 단지 죽음에 도전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롤러코스터를 스무번쯤 타면, 그러한 공포감을 잃게 되지요.


JL: 포뮬러 원 자동차를 운전할 때 말이죠 데이비드, 실제적인 공포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차가 전복돼서 죽을 수도 있잖아요. 실제로 충돌해서 전소될 수도 있는거구요. 롤러코스터를 탈 때 속도나 중력 그리고 낙하를 통해 그 모든 느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 이론은 사람들이 호러 영화를 보러가는 데에는 안전한 상태에서 그러한 느낌을 경험하러 간다는 것이지요. 감독님은 동의하지 않으시겠지요?


DC: 호러 영화를 본다는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은 본능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사색적이지는 않지요. 좋은 호러 영화는 그러한 양자의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행위에는, 제가 아는 한 철학은 결여되어있어요. 


JL: 그래요. 제가 졌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을 공포스럽게 하는 영화들을 왜 보고 싶어하는 걸까요?


DC: 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을 담당하는 치과의사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왜 당신이 만든 공포 영화를 보러 가야하지요? 내 인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공포를 겪고있는데 말이지요."

Posted by 김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