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25건

  1. 2019.12.18 서스펜스
  2. 2019.12.15 .
  3. 2019.12.09 마틴 스코세지, 마블은 시네마가 아니다.
  4. 2019.10.16 스티븐 킹, 글쓰기, 공포
  5. 2019.07.25 맥에서 블루레이 보기
  6. 2019.07.17 이타성에서 도덕성으로
  7. 2019.07.08 .
  8. 2019.07.02 .
  9. 2019.06.03 기생충
  10. 2019.04.22 렌탈카스 닷컴 최악..
카테고리 없음2019. 12. 18. 16:09

인생 키워드 - 서스펜스.

Posted by 김탁구
카테고리 없음2019. 12. 15. 01:44

.

시발 기분 ㅈ같다. 옛날엔 적당히 돈벌면 대충 찍어도 괜찮을 거 같았는데 이젠 마음에 안들게 뭐가 나오면 그냥 죽고싶음.

Posted by 김탁구
번역2019. 12. 9. 19:14

마틴 스코세지 :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설명 좀 드릴게요.

-마틴 스코세지, 2019년 11월 4일

*뉴욕 타임즈 기고문 번역

 



  10월 초에 영국에서, 엠파이어 매거진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마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답을 했죠. 마블 영화 몇 작품을 봤는데 저한텐 별로였다고. 마블 영화는 인생을 통틀어 제가 영화라고 생각해왔고 사랑해온 것보다는 테마파크에 가까운 거 같다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혹자들은 내 말의 마지막 부분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제가 마블 영화를 혐오하는 증거로 볼 수 있다면서요. 그런 식으로 제 말을 규정하고 싶다면, 제가 어찌할 도리는 없습니다.

  많은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재능도 뛰어나고 기예도 우수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스크린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럼에도, 제가 그런 영화들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은 제 개인적인 취향과 기질의 문제입니다. 제가 어렸다면, 프랜차이즈 영화를 재밌게 보고 저 스스로도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요. 그러나 저는 이미 성장해버렸고, 영화란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고 하는 영화에 대한 관념이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블 영화와는 한참 다릅니다.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 별 만큼이나.

  저나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다른 영화제작자들, 그리고 저와 동시대에 영화를 시작한 친구들에게 시네마는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미학적이거나 감정적인 혹은 영적인 발견이었죠. 핵심은 캐릭터입니다. 사람이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이며 사람의 본성은 얼마나 모순적이고 심지어 역설적이기도 한가. 사람들이 서로 상처 주고, 사랑하다 갑자기 마주하는 방식은 얼마나 복잡한가. 이런 것에 관한 발견이었습니다. 

  시네마란 스크린에서 그런 예기치 못한 것들을 대면하고, 시네마가 이야기로 만들고 해석해낸 것들은 현실에서 대면하며 예술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그 감각을 확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시네마는 예술이다. 이게 중요합니다. 당시에는 시네마가 예술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이 있었고, 우리는 문학이나 음악 그리고 무용처럼 시네마도 예술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이란 여러 다양한 장소에서 꼭 그만큼이나 다양한 형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퓰러의 <철모>,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의 <언제나 맑음>,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 그리고 돈 시겔의 <킬러>은 모두 예술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어떻습니까. 히치콕은 자신만의 프랜차이즈를 만들었습니다. 혹은 히치콕이 우리 시대의 프랜차이즈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히치콕의 매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옛날 극장에서 빽빽한 사람들과 함께 <이창>을 본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은 전율이 이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히치콕 영화들에는 테마 파크 같은 면이 있습니다. <열차 위의 이방인>의 클라이막스는 진짜 놀이 공원의 회전 목마에서 일어납니다. 개봉일 자정에 보았던 <싸이코>의 경우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사람들은 놀라고 싶고 스릴감을 느끼기 위해 갔으며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60~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그 영화들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그 스릴과 충격 때문에 우리가 계속 다시 보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편집은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고통스런 감정이나 캐리 그란트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상실감(lostness)이 없다면, 그 편집은 그저 역동적이고 고상한 구도와 컷을 나열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열차 위의 이방인>의 클라이막스도 엄청납니다. 하지만 두 주연 캐릭터들의 상호작용과 로버트 워커가 보여준 심오하리만치 불안한 연기가 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치는 것입니다. 

  혹자는 히치콕의 영화는 다 똑같다고 말합니다.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히치콕 자신도 그 점을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프랜차이즈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똑같음’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네마를 규정하는 많은 요소들이 마블 영화에도 있습니다. 마블 영화에 없는 것은 새로운 발견입니다. 어떤 (인간사의) 미스터리도 없고 (보는 이가) 감정적인 위험에 놓이지도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마블 영화는 특정한 요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제한된 테마를 변주하는 식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제목으로 보면 시퀄이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리메이크에 불과합니다. 마블 영화의 모든 것은 공식적으로 누군가의 승인을 받습니다. 왜냐면, 다른 방식으론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 프랜차이즈 영화의 특성입니다. 소비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시장 조사를 하고, 관객 테스트를 거치고, 심사받고, 수정되고, 다시 심사받고 다시 수정되는 것이죠.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나 클래어 드니나 스파이크 리, 그리고 아리 에스터와 캐서린 비글로우, 웨스 앤더슨은 절대 하지 않는 모든 것을 마블 프랜차이즈는 한다는 이야깁니다. 열거한 감독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제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볼 것이며 이 영화들이 저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심지어 아직 뭐라 이름붙일 수도 없는 경험의 영역으로 말이죠.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한 저의 관념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뭐야? 이렇게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그냥 수퍼히어로 영화나 프랜차이즈 영화들 좀 내버려두지? 하고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국과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대형 스크린에 걸린 무언가를 사람들이 보려 할 때, 프랜차이즈 영화가 우선 순위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건다는 면에서는 아주 위험한 시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독립 영화관의 숫자는 적습니다. 판이 완전히 바뀌어 스트리밍이 이제 배급의 1순위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중 대형 스크린에 걸 생각으로 영화를 디자인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들 극장의 많은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저도 당연히 그런 부류중 한 명입니다. 넷플릭스 용으로 영화를 끝마친 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겁니다만, 넷플릭스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아이리시맨>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점을 항상 고마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틀 기회를 가졌고, 그 자체로도 아주 좋습니다. 저는 더 긴 기간 동안 대형 스크린 위에서 <아이리시맨>을 상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와 영화를 만들든, 멀티플렉스의 상영관은 프랜차이즈 영화들로 꽉 찰 것입니다. 

  혹자가 저에게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일 뿐이라 말한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주고서는 끝도 없이 그 한 가지 것만 판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 한 가지 것을 더 원하겠죠.
 
  그냥 다들 집에가서 넷플릭스나 아이튠즈, 훌루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다른 것을 보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대형스크린에서만 빼고요. 문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대형 스크린에서 보여지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지난 20년간, 영화 산업은 모든 측면에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변화는 은밀하고 보이지 않게 이루어졌습니다. 조금씩 하지만 지속적으로 영화에서 ‘리스크’가 제거되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영화들은 즉각적으로 소비되기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상품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재능있는 팀과 개인들이 만들어낸 웰 메이드 작품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영화들은 시네마에 있어서 본질적인 무언가가 없습니다. 예술가 개인이 만든 하나의 관점(vision)이 없습니다. 이는 당연히, 예술가 개인이 가장 위험한 요인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영화라는 예술에 보조금을 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건재했을 때, 예술가와 경영하는 사람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있었습니다 지속적이고 강렬했지만 또 생산적인 긴장이기도 했습니다. 그 덕에 영화 역사 상 걸작들이 만들어지고 했고요. 밥 딜런 말을 빌리자면, 그러한 긴장관계들 중 최선의 것은 “영웅적이며 통찰력”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런 긴장은 사라져버렸고, 업계에는 예술의 근본적인 질문과 시네마의 역사에 완벽히 무관심한 것들만 남았습니다. 오만하고 독점적인 것들만(최악의 조합입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완벽하게 나뉜 두 개의 영영입니다. 하나는 전세계적인 시청각적 산업이고, 다른 하나는 시네마입니다. 때때로 두 영역을 오가는 작품들도 있지만, 그것은 갈수록 드문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영역 중 산업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점점 더 시네마의 존재를 주변화하고 심지어 폄훼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 꿈을 꾸거나 이제 막 만들기 시작한 분들이여, 현재 상황은 예술에게 야만적이고 적대적입니다. 단순히 그렇다고 끄적이는 것만으로도 무지하게 슬퍼지네요. 



   

        
 

 


 




 

Posted by 김탁구
감상2019. 10. 16. 15:41

스티븐 킹 on 글쓰기

 

"글쓰기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일해야 하는 종류의 직업이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 안에 어떤 망을 가지고 있는데, 망의 크기나 촘촘한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망에는 걸린 것이 여러분의 망은 그냥 통과할 수도 있고, 여러분의 망을 통과한 것이 나의 망에는 걸릴 수도 있다. ...()... 사람은 또한 자신의 망에 걸린 침전물을 파헤쳐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있는데, 거기서 찾은 것이 한 개인을 가두는 일종의 한계가 된다." (<Night Shift>(황금가지) 의 서문 중에서)

 

 

스티븐 킹 on 공포

 

  "공포 소설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흡혈귀나 늑대 인간, 운전사도 없이 저절로 달려 나가는 트럭을 믿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정말 믿는 두려움은 도스토예프스키나 올비, 맥도널드가 보여 주는 종류의 두려움이다. 증오, 소외, 사랑받지 못한 채 늙어가는 것,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험한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 매일매일의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희극이나 비극에 등장하는 가면을 쓰곤 한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다. 그 두 가면이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 기차의 노선을 바꾸는 스위치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을 공포소설은 짚어낸다.

  공포 소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먹던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의 죄악까지 그대로 넘겨받는 연쇄 살인범 같은 존재다. 괴물이나 공포에 관한 이야기는 각종 공포증이 가득 담긴 채 느슨하게 닫힌 바구니와 같다. 작가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그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공포 중 하나를 그 바구니에서 꺼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실제 공포를 대신 넣어 둔다. 적어도 얼마 동안은 그렇게 두게 된다.

  1950년대에는 거대한 벌레들을 다룬 영화들이 마구 쏟아졌다. <괴물들>, <종말의 시작>, <죽음의 사마귀> 등이 모두 그때 나온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 속에서, 크고 징그러운 변종 괴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뉴멕시코 주나 태평양의 산호섬에서 있었던 핵폭탄 실험의 결과로 나타난 것들이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거대한 벌레가 나오는 영화는 모두 하나의 부인할 수 없는 유형을 보이는데, 그것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 열린 시대에 대한 나라 전체의 집단적 공포였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일련의 '십대' 공포 영화가 등장했는데, <십대 늑대 인간>을 시작으로 <외계에서 온 십대들>을 거쳐 아직 수염이 나기 전의 스티브 매퀸이 동기생들을 지키기 위해 푸딩 반죽 같은 변종 괴물에 맞서 싸우는 영화 <얼룩>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거의 모든 주간지에서 매주 청소년 탈선에 관한 기사를 써 대던 시기에, 십대 투사들이 나오는 영화는 아직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던 십대 혁명에 대한 나라 전체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것이었다. 마이클 랜든이 고등학생 재킷을 입은 채로 늑대 인간으로 변하는 장면에서, 스크린 위의 환상과 딸아이가 만나고 다니는 웬 고물 차를 모는 놈팡이가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십대 당사자들이게는(당시 십대였던 나로서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스튜디오-1950년대 B급 공포 영화나 에로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미국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괴물들은 자신들보다 더 추한 괴물들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대상이었다. <나는 십대 프랑켄슈타인이었다>에 나오는 십대 피투성이 괴물에 비하면 얼굴에 난 여드름 몇 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십대 괴물 영화 붐은 또한 어른들로부터 부당하게 대접받고 있다는 십대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이해를 못 한다'는 것이다. 당시 영화들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는데(영화든 소설이든 공포물에는 나름대로 공식이 있다), 이 공식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십대들 전체의 편집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편집증은 부분적으로는 부모님 세대가 즐겨보는 잡지에서 부풀려 보도한 것이었다. 끔찍한 혹을 단 괴물이 엘름빌이라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영화가 있었다. 아이들이 주로 연애를 하는 길에 비행접시가 떨어졌기 때문에, 마을의 십대들은 괴물의 존재를 알고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괴물이 먼저 트럭을 타고 가던 노인을 죽인다(이 노인 역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배우 엘리사 쿡 주니어가 맡았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아이들은 괴물이 정말 마을 주변을 돌아다닌다고 어른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하지만 그들이 듣는 대답은 "귀가 시간 어긴 걸로 방에 가두어 버리기 전에 얼른 나가!" 였고, 엘름빌의 경찰서장은 괴물이 대로에 나타날 때까지 여기저기 쓰레기를 버리며 투덜대기만 했다. 결국 머리 회전이 빠른 한 소년이 괴물을 끝장내고는 자신만의 은신처로 가서 초콜릿 음료를 마시며 무슨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것이 바로 특정한 유형의 영화들을 보며 느끼는 다양한 카타르시스이다. 대부분 열흘 안에 급히 만들어지는 저예산 영화치고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다. 이는 해당 영화의 작가나 프로듀서, 또는 감독들이 그런 일이 생기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기 보다는 공포 이야기가 바로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점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 때문에, 이미지나 비유가 가장 자연스럽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십대 늑대 인간>과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십대 괴물>과 드 팔마의 영화 <캐리>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공포 소설은 대부분 우화적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나 <1984>처럼 의도적인 우화가 사용될 때도 있고 그냥 우화로서만 그칠 때도 있다. 톨킨은 모르도르의 제왕은 환상의 옷을 걸친 히틀러가 아니라는 점을 수도 없이 강조했지만, 그러한 생각을 발전시킨 논문이나 평론은 수없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마 밥 딜런이 노래했듯이, 칼과 포크를 들고 있으면 뭐라도 잘라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ibid)

Posted by 김탁구
모조2019. 7. 25. 12:56

보통은 PS3로 블루레이를 감상하는데,

요새 캡쳐할 일이 많아서 영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블루레이 외장 odd로 두 가지를 고민했다.

 

1. 파이오니아 bdr-xs06

 

2. 그러다 결국 산 것은 로지텍의 물건.. 상품명은 이미지 보시고.. 

 

이 물건으로 하게 된 이유는 명확했다.

=USB 3.0 케이블도 주고 그것에 연결해서 쓸 수 있는 C type 젠더도 준다.

 

아이맥과 맥북에어 (c type 젠더 밖에 없는) 를 동시에 쓰는 나로서는 불가피한 선택.

그리고... 케이블이 본체에 수납되어서 가지고 다닐 때 좀 멀끔한거 같아서..

 

*  *  *

 

블루레이 돌리는 프로그램 역시 뭘 쓸지 걱정을 했다.

처음에는 무료로 배포되는 Leawo bluray player를 써봤다.

막상 돌아가면 잘 돌아가는데...

하나의 타이틀이 재생되기 까지 로딩 시간이 너무 길고, 반드시 한 번은 오류가 난다. 그 오류가 나고, 이젝트를 시키고 다시 삽입하고 로드를 해야 재생이되는 것.

그래서 그냥 하나 질렀다.

 

videosolo bluray player 라는 것.

 

가격은 한화로 약 4.5만 정도 했다.

로딩 시간은 빠른데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1.맥용 앱에서는 DVD는 재생이 안됨.

2.타이틀의 원래 인터랙티브 메뉴를 사용할 수 없음. 

=그러니까.. 인터스텔라 블레를 넣으면 이딴 식으로 봐야한다.

근데 일단 적응을 하니.. 콘텐츠 자체로는 접근이 안되는 콘텐츠는 없어, 대충 눈치 껏 뭐가 뭔지 알게되니 좀 편해졌다. (세뇌)

 

*  *  *

 

캡쳐빌런이 되어가는 나.

 

 

앞으로 레퍼런스 정리하기가 많이 편하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김탁구
모조2019. 7. 17. 14:36

함소원 씨가 인스타그램에 사과하는 것까지 보니.. 일단 남한 사회 한정으로 하여, '우리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덕성에 대해 재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가?'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 사람들이 나쁘다는게 아니라 진짜 궁금증의 차원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1.나이차가 많은 커플 / 2.대마초한 연예인 / 3.낙태 / 4.연예인의 성매매 / 5.수간 등의 문제에 사람들의 분노, '저 새끼들은 도덕적이지 않아'하는 분노가 어마어마한 것 같다(그냥 일반적이었으면 별로 안궁금했을 듯). 물론 수간이야 서로 합의한 것이 아니니까 조금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만(그러나 나는 양꼬치엔 칭따오를 하는 입장에서.. 양이랑 수간을 한 목동을 100퍼센트 떳떳하게 '잔인한 놈 죽어라!!!' 하지는 못하겠다.), 문제를 동물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문제로 한정 시키면.. 이 모든 것들은 굳이 나나 그들에게 어떤 물리적이고 구체적이 폐를 끼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뭐 감정을 불쾌하게 함으로써, 나의 뇌세포를 파괴하고 복구시키는데 비용을 발생시켰다고까지 말하면 할말은 없으나 ㅎㅎ 그럼 존재자체가 나에게 폭력이면 죽일건가?ㅎㅎ)

심지어 이해 당사자들 입장에서 놓고보면 이타적이기까지 한 행동이다. 이해 당사자들은 해당 행위를 통해 금전이든, 쾌락이든 +의 측면에서 작용을 했으니 말이다. 통상 우리가 '무엇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냐'하고 생각해보면, 그게 역지사지고 나아가 공감이고 그런다고 했을때... '그 사람이 그런 행위를 통해 행복하구나'를 생각해보면, 나랑 달라서 생기는 뭔지 모르게 불편함을 넘어서는 저 어마어마한 분노가 어떻게 발생되는 건지 모르겠음.

Posted by 김탁구
모조2019. 7. 8. 14:08

.

너무 즐거웟다

Posted by 김탁구
모조2019. 7. 2. 10:13

.

아침에 가족에게 짜증을 먹으면 속이 쓰리고 눈꺼풀이 떨린다. 아마 나는 화 참다가 홧병으로 죽을 듯.

Posted by 김탁구
감상2019. 6. 3. 12:08

0. 자연스럽게 <설국열차> 생각이 났다. 일단 똑같이 소우주로서의 영화. 인물 하나하나가 사회의 어떤 요소들을 반영하고, 그것이 폐쇄적인  우주를 만들어내는 영화를 나는 소우주로서의 영화라 생각한다. <설국열차>와 <기생충>은 모두 '양극화'라는 소우주로서 작동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설국열차>는 허공에서 발이 떠 있게 느껴지는 탓에, 인물들 각각이 가짜처럼 느껴지지만... <기생충>은 인물 각각이 어느 동네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는 영화였다. 이런 건 진짜 하기 어려운 것이다. 걸작이다.

 

1.<설국열차> 역시 빈과 부, 혹은 양극화에 대한 이야기였고, 영화는 그것의 해결책으로 과거 운동권적인 혁명이 아니라, 시스템 밖에서 사고해야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혁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이 영화가 재미없게 느껴지는 지점 중 하나였다. '시스템 내부에서 혁명하려고 하지 말고 시스템 밖을 사고해야해!' 라고 말하기 위해서, 감독은 그냥 시스템 밖을 사고할 것을 주문한 것이 아니라 일단 시스템 내에서 혁명하는 과정의 무용함에 대해 보여주고 주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과정이 별 상관없이 느껴졌던 것. 그래서 결국은 '이 기차 안의 사람들은 어디서 똥싸나?' 하는 생각에 이를만큼, 그 기체 내의 세계가 가짜처럼 여겨졌다) 

 

2.그러니.. 자연스럽게 <설국열차>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기생충>의 인물들은 '연대'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기우네 가족은 박사장을 아는 순간, 자신의 가족이 박사장네에 완전히 기생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된다. 시계로 재진 않았지만, 실제 4-50분 정도의 분량이 기우네 가족이 완전히 박 사장 내에 기생하는 과정으로 채워져있다. (이게 보통 대중 영화의 1막일텐데, 봉준호가 아닌 자가 1막을 그렇게 써간다면 투자 받긴 글렀을테다 ㅎㅎ ) 그 과정에서 이미 기생하는 다른 사람들, 특히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 혹은 연대의식은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 <설국열차>와 ('우리 식구'의 경계에 대해 탐구하던)<해무>를 거쳐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무엇이 바뀌었는가? "각자도생"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삭막해졌다는 생각을 감독은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3.그런 의미에서 '문광' 여사가 조선중앙TV 앵커를 흉내내는 장면이 재밌었다. 남편은 이에 대해 '역시 종북행위의 지존. 사랑해 여보'라고 반응한다. 과거 '식반봉'에 근거하여 평등 운동을 하던 운동권 부부 역시, 이제는 신흥 자본가에 기생하여 살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대중 조직 스킬로 악명이 높은 NL 답게, 문광이 '충숙'을 처음 봤을때, 문광은 충숙을 세포처럼 포섭할 수도 있었을테다. '우리 함께 자본가 벗겨먹자. 콜?'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왕년의 운동권에게도 이제 연대 의식 같은 것은 없어져버린 것이다. 각자도생을 위한 주인에 대한 봉건적 충성심만 남은 채... 이 얼마나 시의적절한 캐릭터 묘사인가.

 

4.또한.. 연대 의식의 상실은 기택의 칼빵에서도 드러난다. 기택이 박사장에게 칼침을 놓는 동기가 얼마나 시의적절하냔 말이다.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도, 죽은 문광 남편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 때문도 아니다. 결국 '시발것 니가 뭔데 나를 무시해?' 버튼이 눌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 정서야 말로 K-정신이다. '각자도생'이라는 시대 정신이, 결국 생물학과 윤리학의 전쟁터에서 생물학의 손을 들어줘버리고 말았을 때 남는 것..!

 

5.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져버리지는 않았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격이겠지만, 기우네 가족은 조금 먹고 살만해졌을 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 대해 연민하기 시작한다. 엄마까지 박사장네에 들어오고 나서, 주인 흉내를 내는 시퀀스에서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의 각자도생은.. 마, 다 살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고 언제라도 좋아질 수 있다 믿고 있을 터이다.

 

6.하지만.. 우리가 조금의 관용과 여유를 보일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기우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았다며, 수석(부를 상징하는)을 강가에 돌려놓고 돈을 많이 벌겠다고 한다. 그 날이 오면 아버지는 지하에서 올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물론, 의미없는 -혹은 인간이 만들어낸- 상징을 버려두는 것 자체는 좋은 시작이다. 이제 어떤 허례 허식 없이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 집을 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돈을 벌고 집을 사겠다는 태도도 좋다. 하지만... 그 숏 따라 어두침침해보이는 반지하방에서의 공상이라 그런지 고졸에 범죄 경력까지 생겨버린 기우가 인심을 만들 정도로 곳간을 채워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불가능해보인다.

 

 

+ <기생충> 보고 임상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녀>의 세계를 모조리 가져와서 21세기 K-사회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 모두에 적용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봉준호와 정식 리메이크였지만 그냥 그저그랬던 임상수의 <하녀>. '모두다 ㅈ까!! ㅅㅂ 우린 다 망했어!!'와 '사실은 나는 내 안타고니스트처럼 되고 싶어'의 차이 같았다.

 

Posted by 김탁구
카테고리 없음2019. 4. 22. 01:06

다시는 이용하나 봐라.

 

1.예컨대 60만원에 예약하고 미국 현지를 감. 그러면 동일 기종 차 없다면서 최고급 차를 줌. 그럼 쩔 수 없이 130만원을 더내야함.

 

2.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할라고 메일을 보내면.. 매번 이딴식. 지들이 메일로 비밀번호 주기전까지는 문의도 못하는데... 메일이 일단 안오고.. 안온다고 전화로 따지면 48시간 내에 올거라 함 ;; 그런데 48시간 지나도 번호 안옴 ;;

Posted by 김탁구